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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대화목사 주일론에서
On the Roman Empire,
the Jews
and the Christianity

“그러자 용은 여인에게 크게 노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여인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떠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바닷가 모래위에 섰습니다”요한계시록 12장 17, 18절(새번역)


제 1 절 서론

로마의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Augustus Octavius Ccesayitperator, d.14 A D)이래 자신들을 살아 있는 이 지상의 태양신 화신으로 신격화하여 숭배를 받으려 했다. 그들은 “신의 아들(divi filius)", 또는 신으로 된 율리우스의 아들(divi Julifilius)", 등의 칭호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주이시며 신(Nosterdominus et deus)"이 이것들을 명하신다는 식으로, 지방 장관들에게 보내는 회장에 기입하도록 황제(Nero)는 명했다. 원로원(Senate)은 제국의 종교 정책상 이를 인정했으며, 또 로마제국 내의 모든 민족들이 관례적으로 이것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로마가 지중해(the Meditrranean Sea)를 "우리들의 바다(nostrum mare)"라고 자랑하리 만큼 확대된 대제국 내에서 유일하게도 이 제도를 거부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이는 유대인을 신봉하는 유대인들이었다.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유대 민족의 그 독특한 일신교 신봉의 종교적 특이성과 그들 역사적 당위성을 인정하여 더러는 관용을 베풀어 용납하고, 더러는 못마땅히 여겨 학대하였다. 황제 가이우스(Caligula Caius Julius Casar, 재위, 37-41 AD.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했던 그리스계 이교도들의 폭동은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 즉위한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Publius Ajius, 재위, 117-138 AD. )는 달랐다. 그는 여러 면으로 전황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황제의 위에 오르자 제국의 대내외 정책 변혁을 단행했으며, 도처에 산재한 신전들(Pantheons)을 새롭게 보수하거나 신축하고 나중에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거상들을 건립하게 하고, 로마인들에게는 유피테르(Jupiter)로, 헬라인들에게는 제우스(Zeus)로 알려진 신상들을 세우게 했다.
드디어 주후 132년에, 전 로마 제국의 이 거국적인 대 역사를 예루살렘에까지 확대 실시하도록 하는 칙령이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내려졌다. 황제가 내린 이 칙령은 헬레니즘(Hellenism)대 유다이즘(Judaism)의 오랜 대결에 있어서 제국의 황권으로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이었으니, 곧 유다이즘을 영원히 헬레니즘에 굴복시키려는 조치였다. 이것은 하드리우누스가, 그것으로 인하여 일어날지도 모를 하나의 모험적 주사위를 던져 본 망동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애당초 황제가 전혀 예측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당황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본 장에서 하드리아누스가 저지른 사건의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한 후속 조치가 그리스도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 연구 검토하게 된다.

제 2 절 황제 하드리아누스와 유대인들

i) 개설
유피테르를 최고의 주신으로 하는 다신교 국 로마의 유대인과 유대교, 그리고 그 일파로 알려진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차별한 핍박과 조직적이고도 가혹한 대 박해가 있었다. 이 무서운 탄압이 그리스도교에 다시 일기 시작한 것은 바로 제 2차 유대 전쟁의 결과였다. 그것은 주후 132-135년 사이의 참혹하고 가장 무자비한 살육적이었다. 이에 관하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성서 주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후 132-135년에 바코케바(Bar Cocheba)영도 하에 유대인 반란이 있기 이전에는 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고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반의 결과 유대인들과 유대교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하여 유대인이 아님을 증거 하고자 했다.

주후 67-70년에 있었던 제 1차 유대 전쟁으로 “유다 뿐만 아니라 오리엔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longe clarissima urbiumdrientis, non Iudaeae modo)"였던 예루살렘이 파괴되어 황폐된 이래 근 60여 년 간 그대로 방치되어 왔던 그 곳에 유대인들은 다시 재건하여 거기에 성전을 건축하고 옛 유대교의 부흥을 일으키려고 도모하는데 반하여,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유다를 로마의 확고 부동한, 그리고 영구 적인 식민지로 정착시키기 위해 그 곳에 태양신 유피테르를 위한 신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를 건설하여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유다를 헬라화(Hellenize)하려 했던 것이다. 황제의 이러한 계획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황제와 로마 제국에 대한 민족적인 증오심을 심도 깊게 격발하게 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전쟁의 발발 원인이었다.

ii)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 Pubilus Aelius, Emp. 117-138 AD.)는 그의 선황 트라야누스(Trajanus, Marcus Ulpius, Emp. 89-117 AD.)와는 전혀 달랐다. 황제 자신을 신격화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숭배하도록 한 것이라든지, 자신의 후계자를 양자로 삼아 제국의 위를 물려 주는 것 등을 제외하고서는 여러 면으로 아주 달랐다. 황제 트라야누스는 주후 98년에, 양부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Emp. 96-98 AD )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자, 대외 정책에 역점을 두고 정복 전쟁을 통하여 국토 확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우선 도나우 강(the riv. Donau, 일명 Danube)건너편의 다키아(Dacia)를 정복해서, 이곳의 금과 철로 로마를 부요케 했다. 트리야누스(Trajanus)는 이 새 속주에 소아시아(Asia-mino)와 시리아(Syria)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이곳의 천연 자원을 개발하는 인력을 삼았으며, 라틴(Latin)족으로 하여금 이들을 다스리게 하여 로마화했으므로 이 지역의 명칭이 금도 루마니아(Rumania-Romania에서 유래됨)로 불리운다. 아프리카에서는 누미디아(Numidia,현 Algeria)에 새 로마의 도시 타무카디(Thamugadi)를 건설했다. 다음으로 시리아 남부와 나바타에아(Nabataea)를 정복해서 로마의 속주 아라비아(Arabia)에다 병합해 버렸다. 한편, 황제 네로(Nero,재위 54-68 AD. ) 당시부터 국경 분쟁 변경 지역으로서 파르티아(Parthia-Peraia의Arsaces 왕조(ca. 249 BC-226 AD. )--중국에서는 안식 국으로 호칭함)왕국과 충돌해 왔던 아르메니아(Armenia)를 차지하려 했으나, 이 지역은 파르티아(Parthia)를 차지하려 했으나, 이 지역은 파르티아 왕국의 국왕 볼로게세 1세(Vologess I, 51-77 AD. )왕 치세 때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황제 트라야누스는 주후 114년에 원정군을 파견하여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에서 파르티아 왕국의 세력을 축출했을 뿐만 아니라, 여세를 몰아 티그리스(Tigris)강을 건너서 앗시리아(Assyria)를 점령해서 이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주후 115년에는 파르티아 왕국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을 함락하고, 페르시아 만까지 진출하여 로마 제국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그려 놓았다.
그러나 패주만 거듭했던 파르디아 군을 뒤쫓아 파죽지세의 기세를 몰아 너무 깊숙히 추격했던 로마군단들은 파르티아 군대들이 돌연히 반격을 가해 오기 시작하자 당황하여 도처에서 지리멸렬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렇게 전세가 역변 되었다는 소식이 제국 판도 내의 여러 속주들에게 알려지자, 이 때를 놓칠세라 이집트(Egypt)와 유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도처에서 확대되어 갔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집트 전역, 안디옥(Antioch)을 중심으로 한 시리아 키레네(Kyrene : 북아프리카의 Cirenaica에 있었던 도시), 그리고 키프로스(Cyprus)에서 연쇄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직감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아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포기하고 파르키아 원정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도처에서 봉기하고 있는 유대 반란군을 처단하기 위해 로마의 군단들을 즉각 철수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유대 반란 진압 전쟁은 그로부터 3년간이나 맹렬했다. 이것으로 인하여 로마는 두 번 다시 파르티아 원정군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군사력이 쇠진해 버렸다. 상심한 트라야누스는 퇴로에 병을 일으켜, 안디옥을 떠나 수도 로마로 귀환중 길리기아(Cilicia)의 셀리누스(Selinus)에서 주후 117년 8월 9일 애석하게도 급사하고 말았다. 원정군 사령관이었고 트라야누스의 사촌의 아들이면서 또 트라야누스의 여동생 마르키아나(Marciana)의 손녀딸 사비나(Sabina)와 결혼했던 하드리아누스가 양자였기 때문에 그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파빌리우스 아엘리우스 하드리아누스(Pubilius Aelius Hadrianus)는 그의 재임 기간(117-138 AD. ) 동안 선황과 달리 내치에 충실을 기하였다. 그는 22년간의 재위 기간에 태반을 로마 제국의 속주들을 순찰하는 여행으로 보냈다. 그의 발길은 북쪽의 브리타니아(Briannia-영국)에서부터 남쪽의 시리아와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우선 북방의 켈트(Celt)족 반란을 평정하고, 주후 122년에 브리타니아의 새성(Newcastle)지역에 동서에 걸친 장장 73 마일의 장성(Hadrianus성채)을 쌓아 켈트족의 남침을 막았으며 동시에 제국 각 속주의 국경선 구축을 강화하였다. 한편, 파르티아 왕국과는 화약을 맺어 아르메니아를 다시 파르티아 왕국의 보호령으로 되돌려 줌으로 파르티아 계통의 왕위를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아라비아와 다키아(Dacia)를 제외하고서는 성황 트라야누스의 정복자들을 모두 포기하고 나머지의 수비를 확고히 다지려 했다. 그리고 그 동안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소진시켜 버렸던 유대 전쟁을 이제 영구히 방지하고 또 아직도 도처에서 일고 있는 미 진압된 유대인들의 항전을 정치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역사적인 예루살렘(Jerusalem) 방문 길에 올랐다. 황제는 여기서, 유대인들의 숙원이었던 성전을 건축하려는 그들의 간절한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 윤허로 예루살렘 성전 건축 기금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속주들을 순방하는 동안 여러 곳에 로마식 도시들을 건설하고 공공 시설들을 재건하고 확장하는 등, 토목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애첩 안티노우스(Amtinous)가 나일강에 내려왔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집트에 로마식 도시 하나를 세웠는데, 그것이 안티노오 폴리스(Amtinoopolis)였다. 주후 125년경에 트리키아(Thracia-현 Turkey)에 건설한 도시는 황제의 이름을 따서 하드리아노플(Hadrianople-Adrianople)이라고 하며, 또 일명 Edrime이라 불렸다. 황제는 수도 로마에도 베누스(Venus)신전을 위시한 만신전(Pantheon)을 건설했다. 125-134년에 카노푸스 계곡(Vale of canopus)이라는 호화 별장을 티브르(Tibur-현 Tivoli)에 건설하였는데, 태양신 세라피스(Serapis- 이집트의 태양신Osiris)의 신전에 이르는 길목에다 세웠다. 황제는 여기서 항도 알렉산드리아를 가까이 바라볼 수 있었다. 황제는 아테네에 하드리아누스 문을 세웠다. 한 세게 사에서 우리는 다음의 글을 읽을 수 있다.

“특히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여 아테네에서 문화인에 원조를 베풀고 제우스 신전을 완성하고 중심 시 역을 넓혀 후에 나온 문인 헤로스 아티쿠스(Herodes attjicns)와 함께 아테네 부흥의 은인이 되었다. ....한편 로마 시에는 베누스와 로마 여신의 신전 및 황제의 묘를 세웠고 동쪽 교외의 티볼리에는 별장을 세워 미술의 정수를 집중시켰다.”

또 다른 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로마의 판데 온(Pantheon)원형 신전은 가장 크고 모든 점에 있어 주목할 만한 대원 당이다.” 라고 자랑한다. 황제는 토목공사뿐만 아니라 “속주의 통치 조직, 제국의 행정 제도, 관료제 및 군제의 개선” 동을 통해 내치에도 충실했다. 이렇게 제국 내정이 안정되고 번영의 기틀이 잡히게 되자. 도처에서 황제의 업적을 높이는 찬사와 황제의 영예를 칭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를 기념하는 각종 행사가 행해지고 기념비가 세워졌다. 황제 하드리아느스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찬사의 비문이 새겨져 비석이 소아시아에서 발견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 제우스 신이요, 전 인류의 구원자...”

그래서 우리는 또한 하드리아느스의 업적을 찬양하는 고대 문헌들을 발견하는데 어떤 문헌들에 의하면

“하드이아느스 황제는 널리 제국의 영토 안을 순행하고 있었는데 주후 130년부터 다음해에 걸 처서 오리엔트 영역을 시찰하고 도처에 장려한 건조물을 짓거나 제전의 경기를 도입하거나 하여 제국의 재건 자(restitutor)라고 칭찬하였다. 팔레스티나의 여러 도시-가이사리아, 티베리아, 가자 등- 들도 하드리아누스 전당으로 장식되어 황제의 유다 행차를 위해서(adventui aug[usti] Iudaeae)라고 새긴 화폐가 주조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드리아누스는 참으로 평화를 애호하는 황제로서 칭송을 듣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트라야누스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는 전쟁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정하는 대신에 그레코로마(Grceco-Roma)의 문화로 제국의 속주들을 새롭게 구축함으로써 황권을 강화하고 속주들의 제국에 대한 반역을 사전에 방지하려 했다. 그리하여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바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청원을 수락하는 동시에 그곳에 새로운 로마식 도성을 제건 하고 거기에 태양신 유피테르 신전을 건축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주후 132년에 내렸다. 이 행위는 그의 치적 사상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남긴 킨 실책 이였으며, 이로 인하여 유발된 바코게바 반란전(132-135AD)은 한동안 누린 모처럼의 제국 평화를 깨뜨려 버렸던 것이다.

iii) 제 2차 유대 전쟁
주후 70년에 티투스(Totus, Fjavius Vaspasianus, 39-81, 재위 79-81 AD) 장군에 위해 멸망된 이래, 근 60여 년간 그대로 방치되어 왔던 고도 예루살렘 성에도 다시 생기가 솟구치는 듯싶었다.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Bishop of Constantia, ca. 315-403 AD., panarione, chap. 29, para 7: De mensuris etponderibus, chap, 14t) 에 의하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속주 순찰 여행 중 유서 깊은 이 유적지를 반문하였다. 황제는 여기서 유대 실력자들과 저명한 랍비들을 접견했으며 양국의 양국의 평화를 위해 그들의 간절한 청원을 받아 들여 예루살렘에 성전의 건축 재가를 내렸다. 이리하여 유대인들은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되는 기쁨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세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로부터 이 성전 건축 기금이 모금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후 132년 에 포고된 하드리아누스의 예루살렘 성 재건령 은 유대인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황제의 그 칙령이 예루살렘 성을 로마의 도시 형태로 구축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기장을 건립하고 경기가 개최될 때마다. 거행되는 의식을 위해 로마의 태양신 유피테르 신전의 신축이 포함되었다. 황제의 예루살렘 성 재건 계획의 윤곽이 유대인들에게 전해지자 헬라 교육을 받은 진보적 무리들은 내심 환영하였으나 아직까지 대다수인 보수적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반발이 날이 갈수록 의외로 거세 지자 황제는 연이어 할레 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황제의 권위의 절대적인 칙령에 대한 도전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이한 보복 이었다.
장 유스띠에 (Jean Juster)는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다.

“람비들의 문서들이 모두가 한결 같이 하드리안스 황제에게 나타내 보이는 증오심, 심지어 티트스(Titus) 황제에게 나타내 보였던 것들보다 더욱 갚은 원한의 증오심을 일으키는 진술들로 하나가 되자 유대인들의 생존 문제는 더 이상 논의될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같이 나타내 보인 이 증오심은 하드리아누스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적대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짐을 지우게 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

예루살렘 성전 건축 기금 모금 운동은 이제 독립운동 자금으로 둔갑했다. 이 자금을 위해 랍비 아카바(Aqida 또는 Akiba d. 135 AD)는 노구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긴 여행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관하여 아가페 성서 지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 반란의 영적 지도자 (Akiba) 는 해외 유대 동포들의 후원을 얻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이전에 해외로 나가 가울(Gaul), 아프리카와 로마 제국의 한계를 넘어 바벨론과 메데 에 까지 순방하였다.”

주후 132년 늦가을, 드디어 무서운 반란이 움트기 시작했다.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오던 고명한 학자이자 랍비인 아카바의 주도 면밀한 영도하에 이 반란의 음모가 진행되어 왔다. 그는 다윗의 후손중 소위 별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닌 바코게바(Simeon Bar-Cocheba, ?-d.135 AD)를 독립군의 최고 사령관에 임명하고 그를 유대 민족이 학수 고대했던 메시아라 했다.
바코 게바는 집결 완료된 반란군에게 예루살렘을 향한 진군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이 전쟁은 이제까지의 그 어느 전쟁보다도 가장 격심한 절망적인 저항”전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의 폭동이 너무 갑작스럽고 조직적이며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주재 로마 총독 티니우스 루푸스(Tinius Rufus)는 예루살렘 성은 다시 유대인의 수중에 돌아오게 되었다. 반란군은 그 해를 이스라엘 구원 제1년이라 선포하였고 그 이후의 해를 이스라엘 해방 제0년이라 불렸다.
한편 로마 제국과 원로원은 이 반란의 영향이 도처에 미칠 결과에 대하여 매우 우려하고 크게 위험스럽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이를 즉각 진압하기 위해, “로마 집정관 쥴리우스 세베루스(Jujius Severus)를 브리튼에서 불러 황제 자신이 친히 팔레스타인에 출정하여 그와 합류하였다. 이미 유대에 주둔하고 있던 두 군단 (제 6군단 및 10군단) 외에 파노니아(Panonia)와 레티아(Rhetia)와 기타 지역에서 온 소규모의 기병대와 보병대 및 수리아외 아라비아와 다브뉴(Danube)강 유역의 무시아(Mysia)와 이집트 둥지에서부터 군대를 이동시켜 팔레스타인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 다이몬트(Max l. Dimont)는 그의 저작(Jews, God aud History)에서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기원 132년 반란이 발발하지 로마인은 놀랐다. ...유대인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였으며 로마인은 두려웠다. 일반적으로 이 전쟁의 규모나 그 중요성에 대해서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하드리아느스 황제는 달랐다. 그는 만일 로마가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이 제국에 대해 얼마나 튼 위협이 되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불행을 피하기 위해, 가장 우수한 장군이라고 생각되는 율리우스 세베루스를 브리타니아 전선에서 소환하였다. 세베르스는 켈트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고 있었다. 하드리아느스는 세베르스가 아니더라도 병력을 축소해서도 리니아 를 진압할 수 있으며 제국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켈트 인은 유대인들만큼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베루스는 3만 5천의 정예부대의 선두에 서서 ‘성지’에 들어가, 수적으로 훨씬 떨어진 바코케바의 군대를 맞이했다. 그런데 로마군은 면목없이 패배를 맛보았다.”

세베르스는 유대 반란군을 처음에 과소 평가했었다. 그는 반란군의 유인 작전에 이끌리어 돌이킬 사이도 없이 너무 깊숙히 진격해 버렸다. 그리하여 이 작전에서, 주후 7년,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정예 군단(로마 제 3군단)이 게르마니안 족의 부족장 아르미니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이해 토벌하던 중 토니토부르그의 밀림에 유인되어 전멸되어 버린 이래, 가장 비참한 전멸을 당했던 것이다.
“그때에 제 22군단은 로마군의 명단에서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
다이몬트는 계속 진술하였다.

“세베루스는 전투로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미국 남북전쟁에서 셔먼 장군이 취한 수단, 즉 전면 전쟁을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아군의 군대가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모조리 파괴하고 태워 버리는 전법이다. 말할 것도 없이 세베루스는 여기에 또 하나의 로마 방식을 보탰다. 그것은 전투원이건 비전투원이건 닥치는 대로 살육되었다. 그것은 완만하고 야비하며, 가혹하고 가차없는 싸움이었으나 로마로서는 그 도리밖에 없었다. 이 전쟁에서 패할 수는 없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서 쌍방이 모두 말할 수 없는 인명 피해와 군사력을 소진해 버렸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바코게바 반란 기간 중에 로마군이 요새 50개를 점령하고 985게의 마을을 파괴하고, 1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으며, 로마군 자체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손실이 너무 커서 전쟁이 끝나자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에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황제와 그 군대는 건재하다.’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주후 135년, 예루살렘 탈환 군 총 사령관 세베루스가 이끄는 그의 군단들에 의해 무려 3년간의 긴 세월 동안에 이 폭동은 가장 잔인하게 집압되었고, 예루살렘은 또 다시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이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 출입이 제한되었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155-235 AD.)의 말에 의하면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에, 완전히 도괴 도어 버린 그 장소에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라고 불리는 도시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유피테르에 봉헌하는 새 신전을 세웠다.”

“이 때로부터 유대인들은 이전의 예루살렘 죽 새로이 세워진 ‘식민지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1년에 한번, 1차 유대 전쟁 때의 예루살렘 함락 기념일에만 구 신전 벽에 매달려 통곡의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될 뿐이 였다. 이것이 지금 남아 있는 ’통곡의 벽‘ 이다.”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이자 로마군 최고 통수권 자였으며 군의 위대한 전력 가이기도 했다. 그는 오랜 군 생활에서 많은 전쟁을 겪는 동안 전투에서 진 적은 있어도 전략에서 실패하거나 전쟁에서 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유대 반란 진압 전쟁에서는 그가 결코 이전의 당해 보지 못했던 로마의 일개 군단이 전멸 당하는 쓰라림 (제 22군단은 로마군의 명단에서 아주 사라지고 말았다.)을 잊을 수가 없었다. 로마군의 막대한 손실은 황제 자신의 명에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의 말대로, “ 그 손실이 너무 커서 하드리아누스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나와 그 군대는 건재하다. 라는 말은 사용할 수가 없었다.” 고 할만큼 막대한 생명과 물량을 잃었던 것이다. 이 수모, 이 분통을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아물 길 없는 깊은 상처를!
이 때로 부터 하드리아누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은 맹렬히 불타기 시작했다. 그 증오심이 얼마나 심했는지 광적이었으며 오히려 병적 이었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였다. 이제 제국 내에서 유대교는 불법시되어 대대적인 박해를 당하게 되었고 그리스도교는 그 분파 중 하나로 간주되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유대인 박멸 정책(Amti-Jewish Polcies)에 관하여 바키오키(Samuele Bacchiochi) 교수는 아래와 같이 진술하였다.

“한편 그 당시 로마는 군사 법령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새로운 행정적, 재정적 정책들을 수립했다.. 베스파니아누스(Emp Vespasianus.재위 69-79 AD) 황제 치하에서는 산헤드린회와 대제사장 제도(사무국)가 둘다 폐지되고 성전 경배 등만 금지되었을 뿐이 였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치세 하에서는 우리가 앞서 본 대로 유대인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새 도성 지역에 출입하는 것을 사형으로 엄단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 의식 수행과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불법화 했다..”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이러한 반 유대교 정책들이 주후 500년경에 편집된 유대인들의 종합적인 법전이라고 할 수 잇는 그들의 전승 집 탈무드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로마 정부가 토라(율법서)를 금하고 우리 아들들에게 할례를 금하게 하며, 또 안식일을 모독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도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세 가지 금령을 사형으로 다스렸다. 그런데 이 금령들 중 그리스도교 역시 저촉되는 조항은 안식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발생됐던 변증 서들, 외경 및 위경서 들은 한결같이 다음의 글귀들을 찾게 된다.
①“그리스도인 들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②“그리스도인 들도 일요일 예배로 모입니다.”
③“제 8일은 기쁨으로 지키자.”
당시 변증서 저작자들의 변증 내용의 공통점은 그리스도인 들은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것이 였다. 니이브(J L Neve)는 그의 저서 「기독교 교리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로마 제국을 배경 삼고 있던 이교 전체가 기錢났도涌“ 반감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은 국가에 대한 하나의 반역적 존재로 인정되었으며 그들의 도독과 신앙이 모두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 결과로 그 생존의 권리를 변증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으며 이와 간은 대적과 맞서는 데 필요한 학식을 갖춘 변증 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라고 했다. 이리하여 호교론 자들이 도처에서 일어 낫고, 그들은 한결같이 안식일 준수를 비난하게 되었으며 일요일 신성론을 폈다. 즉 제국이 단행했던 정치적, 사회적 및 종교적 반 유대교 정책이 결국 로마의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안식일 예배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 일요일 예배 발생의 산파역을 했던 무리들은 식자층에 속하는 이들인데 소위 영지주의자(gnosticism)였다. 이들은 초기 기독교적 반 유대주의 신학자들이었다.

iv) 발견된 점들

제2차 대 전쟁의 결과는 유대인들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비 유태계 그리스도인들 에게까지 미치는 무서운 박해가 그 후유 중으로 발생되었다. 그것은 제국의 위정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단순히 유대교의 도 다른 한 분파로만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오인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는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그 신을 그리스도인 들도 믿는다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에서 사용했던 경전은 구약 성경뿐이었는데 이것은 바로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 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초기 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지켜 온 예배일이 유대교의 성일 인 안식일(σ?ββατον)이었다. 이 세 가지 공통점만 가지고도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이 세 종교적 요소들은 양자의 핵심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 지각 있는 기독교도들 중 대다수는 기독교가 당국의 모진 박해를 모면하려면 이 세 요소들을 제거하는 길밖에 는 없으리라고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생지옥 가튼 박해에서 기독교를 구하기 위해 두 유형의 호교론 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 부류는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근본적 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박해를 중지해 줄 것을 문서를 통하여 위정자들에게 호소하는 소위 변증 학자들(Apologists)이고, 다른 부류는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종교적 의식과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니산월 14일의 유월절을 비롯한 모든 절기들과 율법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는 구약 성경이 아니라 신약 성경을 믿고, 잔인하고 악한 유대인의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인자하고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며, 안식일은 즐거운 날이 아니라 단식하는 날로 경멸해야 할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는 소위 개혁자들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이 곧 영지주의 신학자들 이었다.
전자가 대외적 호교 활동을 폈다면 후자는 대내적 활동을 통해서 기독교를 구하려 했다. 이 두 운동은 공히 동시에 발생한 반 유대주의에 근거한 것이 였다. 전자의 대표적 인물은 순교자 유스티누스 였다고 한다면, 후자의 대표적 인물은 영지주의적 이단자 마르키온(Marion)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사람은 동시대의 사람들로서, 피차 서로 교제는 없었으나 양자가 다 로마에서 활동했으므로 로마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 이었다. 특히 마르키온은 자기를 추종하는 많은 무리들을 통해 도처에 교회를 따로 세웠다. 그리하여 초기 로마 교회는 이중적으로 위협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다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그들의 고충인즉, 황제가 증오하고 전체 로마 시민들과 교회 일부가 멸시하는 이 관습(안식일 예배)을 어떻게 같은 로마인으로서 준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국가가 범국민적으로 반 유대교 정책을 강력히 벌이고 있는 이 마당에서 유독히 유대인의 모든 관습들을 이 지상에서 송두리째 말살해 버리려고 황제가 안식일 준수 제도를 사형으로 금하고 있는 이 때에 비 유대 인적으로서 어떻게, 그리도 동일한 라틴 민족적 차원에서나 시민적 차원에서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고 그 유대인의 관습인 안식일을 준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그 당시 로마 교회 지도자들이 당면한 가장 심각하고도 시급한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① “그리스도교는 유대교가 아니다.” 또는 ②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당국에 뚜렷이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동시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유대교 특유의 냄새가 가장 진하게 풍기는 안식일 예배일을 비 유대교 적인 다른 날로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이교도들이 신성시하고, 국가가 존중히 하는 태양의 날(dies solis-the day of sun : sunday) 즉 일요일을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이라는 미명과 대의 명분으로 감히 예배하는 날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속사도 시대(Sub-Apostlic Age)의 초기에는 기독교가 당국의 모든 박해를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순교로 감수했었다. 사실, 그들은 그 곤욕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조건 참았다. 그리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여 영광으로 여겼다. 이는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실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최대의 소망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속사도 시대 후기부터는 닥치는 이 박해에 대한 교회의 반응이 지역에 따라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교회는 당대의 세계적으로 유력한 학자들과 귀인들이 상당히 개종하여, 교회 구성원의 적정 면에서나 양적 면에서 현저히 달라져 갔다. 저명한 철학자들, 법률가들, 유수한 석학들이 개종해서 입교했고, 나중에는 이들이 교회의 지도적 요직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그레코-로마의 철학적 학식의 배경을 지닌 교회 지도자들, 교부들, 호교론 자들은 당국이 기독교에 내린 부당한 박해에 대해서 능란한 솜씨로 변증하거나 체계 있게 학술적으로 논박하면서 교회를 변호하고, 나중에는 절충을 통해 타협해 보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 산물들 중 하나가 곧 “부활절-일요일 축제”(Feast of Easter-Sunday)였다. 매우 일찍 부처 로마 교회가 이 축제 의식을 제정하여 거행하기 시작했으니, 이는 그리스도인 들에 대하여 분노한 모든 계층의 이교도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려 보려는 전략적 의도였으리라. 그래서 교리 사가들은 이것을 “로만 이스터 썬데이”(the Roman Easter-Sunday), 또는 “로만 심볼스”(the Roman Symbols)라고 했다.
이 축제 의식은 일석 삼조(一石三鳥)의 효과를 노린 치밀한 계략에서 산출된 제도였다. 즉 그것은 로마 교회가 문제의 두 유대교의 중요한 기본 예배 의식과 그 제도를 한 번에 배척하게 되는 동시에, 이교도들의 성일 인 일요일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서 신성한 날로 준수하게 됨으로 이교도들의 동정과 마르키온 파의 호감을 살 수 있다는 속셈이었다. 환언하면 유대교의 연례적인 명절 니산 월 14일의 유월절(the Passover) 대신에 이교도들의 명절인 태양신 부활절 이스터(Easter)를 “그리스도의 부활절”이라는 명칭으로 대치하여 성축하고, 동시에 제 7일 안식일 대신에 매주의 “태양의 날”(dies solis)을 “주의 날”(the Lord's [day]-이교도의 명칭)이라는 이름으로 대신 성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음흉한 모략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숙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리 사가들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교 사상의 한 성장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유대 땅에서 기원된 원시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인 그리스도교로 발전하려면 그 유대 땅 토양에서부터 탈피하고, 국제적인 토양에로 토착화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이 “부활절-일요일 축제 의식”이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논증한다. 그래서 영국의 교부 학자 라이트푸트(J. B. Lightfoot, 1828~1889 AD.)교수가 증언하듯이 로마나 알렉사드리아 교회들은 “유대주의 적인 것이라면 그 모양까지라도” 피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부활절 일요일, 또는 부활주일을 받아들였던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그리스도교 내에서 발생한 소위 반유태주의라 하는데,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를 기점으로 하여 세계에 퍼졌다.
그러나 이 축제 의식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통”(the Orthodoxy of Christianity)을 이어 가려는 동방 교회(the Eastern Church)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주후 154년경, 마침내 소아시아의 노 감독 폴리카르푸스(Polycarpus, ca. 69~155 AD.)로 하여금 85세의 고령의 노구를 이끌고, 이 문제의 로마 교회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게 했고 여기서 세칭 부활절-일요일 논쟁(Easter-Sunday Controversy)을 치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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