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 - 근심 걱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
2009.04.20 22:34
불신앙 - 근심걱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
이 병 창(시인. 진달래교회 목사)
소리공부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부르는 노래 가운데 ‘사철가’가 있는 데 그중 한 대목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내 청춘도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려워라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헐 말 들어 보소인간이 모도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 인생 아차 한 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인생에서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사십은 너무 많고 사년이라도 제대로 될 수 있을까 싶다. 걱정 근심의 문제를 여하히 넘기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이스어로 근심(merimna)은 무엇을 구하기 위해 애를 태우다. 무엇을 두려워하다 등의 의미가 있다. 또 비애, 염려, 걱정거리, 무엇에 대한 고통 등의 뜻도 있다. 인간이 지닌 근심 걱정은 언제나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 즉 근심은 ‘ 자기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가지는 현실적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몸 나’를 나로 알고 유한한 지구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인간의 헛된 욕망에 근거한 두려움이 각자에게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의 지혜이다.
인간의 숙명적 문제인 근심에 대하여 설명해 주는 그리이스 로마인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는 날 근심(Cura)이 강을 건너다가 좋은 진흙을 발견하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거의 다 만들 즈음에 주피터가 왔고 근심은 자신이 만든 것에 정신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주피터는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근심이 완성된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 하자 주피터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라고 요구하였다. 그 바람에 다툼이 일어났는 데 땅(Humus)도 이 새로운 작품 속에 자신의 몸의 일부가 들어갔으니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이 셋은 파종의 신인 사투른에게 심판해 달라고 요청했다. 사투른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주피터, 너는 정신을 제공했으므로 이것이 죽으면 정신을 가져라. 땅, 너는 몸을 제공했으므로 이것이 죽으면 몸을 가져라. 그리고 근심, 너는 먼저 이것의 형체를 만들었으므로 이것이 살아 있는 동안에 너의 소유로 하거라. 그리고 싸움의 원인이 된 이름은 이것이 땅(Humus)로부터 만든 것이니 호모(Homo)라고 하여라’
인간은 근심하는 존재이다. 그 근심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 사랑의 목마름에 근거한 인간관계에 대한 근심, 자신의 소유에 대한 근심이다. 살아있는 동안에 근심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근심에 뿌리를 박고 있다. 생존 본능과 사회적 본능과 성적 본능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는 근심걱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은 근심걱정하면서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믿음이 없이 사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선언하셨다 (마태6:25-33)
같은 일을 해도 근심걱정의 투사로써 뼈 빠지게 하는 사람도 있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콧노래 부르며 일하는 사람도 있다.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할 때 그는 소심해져서 창조적으로 일하기가 어렵다. 그는 경황없이 바쁘게 일하지만 그에게 인생의 보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나의 최종적 관심과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이다. 마태복음 6장은 생계를 위해 하던 일들을 접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전적으로 헌신했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지만 삶을 위한 노력과 책임, 안전을 위한 대비책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한 걱정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영원을 위한 관심에 눈을 돌릴 때 근심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이 땅에서 우리가 성취해야할 과제이다.
근심걱정으로 사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그 걱정의 대상이 자신의 우상이 된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우상의 노예상태에서 마음은 고요해 질 수 없다. 두려운 마음으로 근심하는 하는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걱정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이다. 우리는 내 자신과 가족에 대해 책임 있게 살아야 하고 지혜롭게 시대를 대비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몫까지 내가 하려고 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며 믿음을 져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의 지성소에 있다. 그 지성소에 근심걱정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지구에 있는 인간들의 삶의 패턴이라는 것을 에니어그램은 통찰해 주고 있다. 내가 지금 삶을 평안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근심걱정으로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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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심걱정하며 사는 존재는 믿음이 없이 사는 자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말씀이 깊은 성찰을 불러옵니다.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영원을 위한 관심에 눈을 돌리는 것, 그것이 근심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이며 이땅에서 우리가 성취할 과제라는 말씀이 저에게 답으로서 다가옵니다. 근심걱정이 아닌 하나님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내 마음이 평안해지고 고요해 지는 것. 이것이 제가 해야할 일이며 바로 지금 여기에 기쁘게 존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해 집니다. 평화롭습니다. 기쁩니다.
무엇때문에, 누구 때문에가 아닌 그냥 지금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