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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냥 사랑입니다

2009.05.25 19:51

물님 조회 수:6270

 

  세상은 그냥 사랑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후에 갈릴리 출신 제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일상생활인 고기잡이를 했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와 다른 여섯 제자로 구성된 일곱 명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숫자 7은 상징적 의미가 있다. 하늘의 숫자 3과 땅의 숫자 4가 합쳐진 7은 거룩한 숫자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의 결합이다. 그들은 일상의 일을 하면서도 부활하신 분을 함께 만나고 증언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상황은 여러 가지 면에서 암울했다는 것을 요한복음서는 전해주고 있다 (21:1-14).


제자들은 한 밤중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이 헛수고만 했다. 그들은 실망했고 지쳤기 때문에 호숫가로 돌아와 암울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요한은 바로 그 우울과 절망감이 지배하는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새벽녘에 그들은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사람들아, 무얼 좀 잡았나?’ 하고 그가 소리쳤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그가 말하였다. ‘그물을 배 오른 쪽으로 던지게. 그러면 많이 잡힐 테니’ 그래서 그들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153마리)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조차 없었다.” (4-6절)


부활하신 예수는 새벽을 새벽답게 맞이하지 못하고 어둠과 절망으로 맞이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 그들의 일상적인 생활, 그들의 우울한 현장에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는 어린아이에게 이르듯 말을 건네며 질문하였다. 무엇을 잡았는가? 그들의 손과 가슴에 무엇이 있는지를 물으셨다. 인간의 역사는 수고와 노력의 땀을 흘리는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가 얼마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사람들의 삶이 애매모호한 까닭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자신의 에너지원이 되는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과 삶이 인류에게 복음이 되는 것은 인간의 눈멀고 애매모호한 삶이 개안이 되는 지혜와 능력을 베풀기 때문이 아닌가.


늘 해오던 대로,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살아가는 기계적 삶으로부터 깨어나는 삶의 부활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이다. 삶의 모든 순간들과 만남들이 바로 은혜요, 사랑임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삶의 부활이다. 늘 그런 이로 살아가는 ‘늙은 이’는 자신의 모든 것 안에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나는 당신의 은혜로움으로 눈을 뜹니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의 내용과 질은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고 그물이 넘치도록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다. 이 숫자 역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사막의 교부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피타고라스의 수비학적 해석으로 100은 정사각형, 28은 삼각형, 25는 구형인데 세상의 모든 대립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삼각과 정사각형처럼 서로의 모양이 다른 데서 오는 갈등상황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그것들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 날 때 부활하신 예수와의 만남은 그 모든 것들을 하나 되게 한다. 복수의 칼을 내려 놓게 하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한다. 일체가 완전하고 아름답고 충만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든 것은 하나의 원 안에서 서로 결합되고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하고 말하자 베드로는 물 속에 뛰어 들었다. 제자들은 자신의 어둠 때문에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바로 이것이다. 나도 지금 이 순간 내 문제 해결에 골몰하여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고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활의 예수는 암울한 내 현실 속에 찾아오시는 분이며 친교를 하시고자 하는 분임을 알 때 우리의 삶은 부활의 빛으로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일상의 반복적 삶에서 깨어나야 한다. 새벽 햇살이 모든 이에게 같은 것이 아니다. 애벌레의 아침과 나비의 아침이 같을 수 없다. 내가 나로부터 깨어나는 부활, 내가 만물로부터 깨어나는 부활이 있어야 영생의 부활이 있음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삶의 깨어남을 적은 회복님의 에니어그램 수련 소감문을 전제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느끼지 못했던,

마음을 여는 글귀를 통해서도 알지 못했던

이 느낌은 무엇일까요.

온몸을 타고 도는 전율에 눈물이 납니다.

닫혀있고 갇혀있던 나의 감각들이 깨어나고 싶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영혼이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존재의 근원을 응시해봅니다.

나에게 고통 주는 이는 나를 깨우기 위해서 온 천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비웃음으로 씹어 삼켰던 그 말이 진실로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그냥 사랑이네요.

아무런 원망도 미움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은 그냥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