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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한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절로 데려갔다.
욕심에 찌든 속세가 탁하니 절대 산을 내려오지 말아라」
는 말을 남긴 뒤 산을 내려가시는 어머니.
첫 삭발.

세상의 인연이 부뚜막의 장작과 함께 훨훨 타오르던 날.
나의 믿음이신 그 분의 품안에 안겨
흥건히, 흥건히 목놓아 울어버렸다…』

제 그림 그리기는
비워지지 않는 존재의 반성이고
텅빈 존재의 충만을 만나기 위한
열망의 한 표현입니다.
먹을 갈다보면
묵묵히...
비워지는 존재의 작은기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부대중과 함께
그림을 통해
동심의 무구함을 만나고
텅빈 존재로 해맑게
거듭나길 발원해 봅니다.
원성 합장



발그레한 볼에 해맑게 웃는 동자승(童子僧). 20대인 원성스님은 동자승만 그린다. 그의 그림에는 고행하는 수도승, 성불한 부처님은 없다.대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인간적인 아기 스님들이 화폭을 메운다.

『나 자신의 허물과 욕구를 그대로 내보인 게 동자승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지요. 스스로를 내보임으로써 자신을 꾸짖고 돌아보는 계기로 삼고 있습니다. 화선지 위의 물 번짐과 흐름, 붓질을 바라보면서 나를 느끼게 되고 섬세한 한 선 한 선을 그리다보면 선(禪) 못지않은 삼매(三昧)에 빠집니다』
마음의 고요 없이 동자승은 그릴 수 없다고 말한다. 서울 상계동 학림사에서 수행중

「동자승(童子僧) 화가」로 널리 알려진 원성(圓性.중앙승가대 재학중)스님. 그가 펴낸 시화집 「풍경」「거울」((이레)을 펼치면 속세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불가에 몸을 맡기게 된 가슴저민 사연부터 맞닥뜨리게 된다. 득도를 향한 고행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젊은 스님이 쓴 90편의 시에는 세속의 삶을 잊지 못하는 외로움과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는 또 흙담벼락에 기대 봄볕을 쬐고 단풍이 물들 즈음이면 바랑을 메고 정처없이 만행을 떠나는 스님들의 일상생활과 치열한 번뇌 끝에 깨달음을 얻게 됐을 때의 희열도 전해준다.

「산사의 새날을 고하는 우렁찬 법고(法鼓)의 울림소리/영혼을 맑게 하는 거룩한 부처님의 음성/그대는 아시는가요/사물의 의미를」(「깨달음의 네가지 소리」 ) 그러나 이 책의 백미는 스님이 그린 92점의 그림. 그의 그림에는 고행하는 수도승,성불한 부처님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배고프면 먹고,졸리면 자는 순진무구한 동자승들의 모습만이 가득하다.

- 그 눈빛하나로 이 세상 업을 다 씻어낼 아름다운 부처 -

정식으로 그림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첫 전시회 때 출품한 작품 2백여 점이 모두 팔려 화단을 놀라게 했던 원성 스님. 그의 전시회에는 큰스님에게 설법을 들으려 오는 불자들처럼 매회 관람객이 몰려들곤 한다. 수녀, 목사, 대학생, 주부 등 나이와 종교에 상관없이 골수 팬도 많이 생겼다. 연예인처럼 팬클럽까지 생겼을 정도.

미국, 일본, 이태리 등 세계 각지에서도 초청전을 가질 만큼 스타 화가가 된 그가 오는 8월18일부터 24일까지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그 준비로 분주한 스님을 만났다
어머니와 아버지 통해 승가와 속세의 삶 비교

불심이 우물처럼 깊은 어머니와 성취욕이 강한 아버지 사이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외가는 대대로 불자 집안이어서 어머님은 과외 선생이었던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출가를 꿈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머님 역시 8남매 중 막내이셨습니다.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 생활을 하신 아버지는 사업에 뜻이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지요. 아버지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어느 날 변호사 사무실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좇아 지방 소도시로 떠났지요.

아버지의 변신에 대해 어머니는 가타부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특별히 만류한 적도 없고, 사업가 아내들이 그렇듯 불안해한 일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불을 하고 좌선를 하며 마음을 닦으셨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저는 승가의 삶과 속세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무의식중에 비교하며 자란 것 같습니다. 소유욕이 없었던 어머니는 늘 고요한 물 같았고, 세상살이에 집착했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번뇌와 번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곤 했지요. 그 교차 지점에 서 있던 저희 3형제는 어머니의 삶을 닮고자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르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언제나 형제들 곁에 있었고, 또 아버지가 좇는 돈이 없어도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머니가 다른 많은 아이들의 어머니들처럼 세속적인 것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했습니다. 좋은 옷과 맛있는 반찬을 챙겨 주었으면 했지요.

그러나 어머니는 자식들의 일상에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밥도 각자 스스로 챙겨 먹게 했고, 학교 생활도 알아서 잘 하겠거니 신경쓰지 않았지요. 어린 저로서는 불만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왜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따진 적도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은 다 순간이란다"

어느 날인가는 학교가 파해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때문에 모두들 학교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어느 순간 주변을 보니까 저 혼자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 둘 우산을 들고 마중나온 어머니들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어린 저로서는 보나마나 법당에서 예불이나 드리고 계실 어머니가 몹시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불평을 터뜨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가 매일 오는 것도 아닌데 좀 맞으면 어떠누. 어차피 빨래하는 사람도 너니까 옷이 젖는 것에 미안해할 필요도 없고, 또 비 맞기가 싫으면 특별히 급한 일도 없으니 처마 밑에서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와도 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언제나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에도 크게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머니에게는 특별히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속옷이건 겉옷이건 옷이란 옷은 실오라기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깁고 또 기워 입었고, 가재도구나 생활용품은 한 번 사면 종신형을 선고할 만큼 버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예불할 때 쓰는 방석을 30년 동안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사용하셨다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죠.

근검 절약하는 데 있어서는 아버지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새 학기만 되면 아버지는 다른 집 아이들이 버린 노트들을 한 아름씩 주워오곤 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사용한 그 노트들은 대개 뒷부분 몇 장이 낙서 하나 없이 비어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빈 낱장들을 뜯어 한데 묶어서 쓰도록 했지요. 그리곤 새 노트를 사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갖는 저희들에게 모든 사물은 각기 다른 목적과 용도가 있어 태어났는데 그것의 생명이 끝나기도 전에 폐기처분해서야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럴 땐 아버지와 어머니가 참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는 걸 느끼곤 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모든 것 정리하고 출가

어머니는 지극히 종교적인 분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옷이나 학용품을 사주는 데 있어 맏이인 큰형에게는 비교적 너그러운 반면 막내인 저는 있는 듯 없는 듯 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빨래나 청소, 혹은 밥짓고 설거지하는 일 등 집안의 궂은 일은 모두 제가 맡아서 하도록 했지요. 그런 어머니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더욱 열심히 했지요. 그래도 서운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그 서운함이 얼마나 사무쳤던지 출가한 후 언젠가 그 연유를 재미삼아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께서는 "스님은 내가 채워주지 않아도 늘 넘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시더군요. 형들처럼 갖고 싶은 것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고, 집안 일이든 학교 공부든 항상 형들보다 앞서는데 그렇게 자잘한 일상까지 챙겨주면 넘침이 지나쳐 교만해질까 염려되어서 였다고 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인지 2학년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무렵 아버지는 사업을 크게 벌였다 실패했습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가족들이 거주하던 대원사를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이지요. 그럼에도 어머니는 평상시와 같이 예불을 드리고 삼백이십사배를 올렸습니다. 이렇다 할 충격이나 변화가 없었지요. 그냥 조용히 짐을 쌌고, 법사이신 어머니를 따르던 보살들의 도움으로 미아리 쪽에 절을 세웠습니다. 파산을 그렇듯 소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였기에 제 기억에는 아버지가 언제 사업에 실패했는지 정확하게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파산 선고 이후 집안 경제는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저희 3형제를 어머니 혼자 부양해야 했기에 많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했고, 고통을 호소해 오는 불자들의 마음을 부처님 말씀으로 달래 주었으며, 밤에는 만학도로서 야간대학에 다니며 불교학을 공부했습니다. 어머니의 쉼 없는 기도와 학업에 대한 열의는 그 시절 저희 3형제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지요. 하지만 저는 새벽이면 형제들 몰래 어머니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불정사라는 절을 세운 후에도 어머니의 관심은 자식들 교육 문제가 아니라 수행이었기에 저는 자청해서 집안의 마당쇠와 하녀 노릇을 다했습니다. 마당과 방을 쓸고 닦고, 식구들 뿐만 아니라 신도들을 공양할 요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곤 했지요. 어머니가 두 형들을 제치고 집안일을 저 혼자 하도록 한 것에는 다른 이유 없었습니다. 형들보다 제가 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소를 해도 저는 단순히 쓸고 닦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사용했던 빗자루와 걸레를 깨끗하게 씻어놓고 빨아놓을 정도로 뒷마무리를 잘했습니다. 요리의 경우 한 가지만 가르쳐 주면 10가지를 응용해 만들어 낼 만큼 눈썰미가 있었지요.

사업 실패 후 아버지는 비로소 집착과 욕망의 끝을 보셨던지 속세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없이 출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머니는 이미 그렇게 되리라 예감하고 있었던지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지요. 그게 벌써 15년 전 일입니다.

중학교 시절 저의 숙제는 무엇을 하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쓴 헌 참고서를 붙들고 열심히 공부했고, 그림도 부지런히 그려 각종 공모전에 출품했습니다.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고 과외 수업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운이 좋았던지 출품하는 족족 상을 받았습니다. 87년 서울시 미술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고, 88년에는 국제 유네스코 미술대전에서, 89년에는 한국데이터통신에서 주관한 '인간과 커뮤니케이션' 포스터 공모전에서, 91년에는 서울신문사 일러스트 공모전에서 각각 금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때 받은 상금만도 3백여만 원이 되었지요. 이 모든 것을 저는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어머니가 기뻐할 것 같아서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의 이 같은 짝사랑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절을 찾는 불자들을 만났고,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가난한 보살들의 주머니에 쌀 한 줌씩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창건한 저희 집 대불정사에는 젊은 청년 스님들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맑고 고요하면서도 자유로운 스님들의 삶을 관찰하며 저는 '나도 저렇게 바람처럼 산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하곤 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가 아프거나 사고나

당시 제게는 꿈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화가, 피아니스트, 요리사, 선생님, 의사 등이 제가 걷고 싶은 길이었지요. 이중 어느 것 한 가지도 저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욕심이 많았습니다. 모든 일을 다 하고 싶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저에게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능이 많았습니다. 피아노의 경우 절대음감이 있어 악보를 보지 못하는데도 멜로디를 듣기만 하면 연주할 수 있고 또 간단한 환자들의 경우 아픈 곳을 손으로 짚어주면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지곤 했지요. 어쩌면 저는 전생에 의사나 화가, 혹은 악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학창 시절 저는 남들과 다른 아주 특이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제게 영성이 있었던 것인지 꿈을 통해 전생을 볼 수 있었고, 누군가를 미워하면 미움을 받는 당사자가 꼭 아프거나 사고가 나곤 했지요. 어린 시절에는 그런 현상들이 무서워 자해한 적도 있습니다. 정신 세계를 분석한 책들을 읽으며 스스로 극복하긴 했지만 당시에는 남과 다른 힘이 있다는 것이 무척 괴로웠습니다.

그 힘은 저로 하여금 막연하게나마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힘들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출가를 결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니까요. 물론 출가를 결심하게 된 이유에는 제가 세속적으로 살아가기에는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물질적인 욕구와 정신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한 가장으로 살아가려면 제가 꿈꾸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스님들을 위해 제가 되고 싶었던 모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오랜 결단 끝에 마침내 출가하기로 하고 어머님께 뜻을 비추자 어머님은 기다렸다는 듯 "됐다, 얘야 가자" 하시며 덥석 손을 잡더니 수락산 학림사로 이끌었습니다. 그 곳에는 저의 스승이 되신 도원 스님이 계셨고, 저는 그 길로 절에 눌러앉았지요. 어머님은 제가 출가하게 되리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벌써 도원 스님과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지요. 하긴 어머님께서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노래하듯 스님 예찬론을 펴곤 했습니다. "얘야, 스님이 되는 것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어렵고 힘든 것이란다. 당연히 스님은 그 어떤 권위 있고 똑똑한 사람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림사에서 행자 생활을 한 후 해인사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3년 동안 큰스님들을 모시는 시자 노릇을 하며 승가의 예절을 익히고 자연을 배웠습니다. 큰스님들은 음식 잘하고 청소 잘하는 저를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린 시절부터 절집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단련되어진 것 같습니다. 매일같이 새벽 4시면 일어나 삼백이십사배를 하고 좌선하느라 무릎에 굳은 살이 박힌 어머니를 보며 수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알았고, 대불정사 빨랫줄에 걸려 있던 어머니의 누더기 속바지를 보며 근검절약을 배웠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몰랐지만 출가한 후 깨닫게 된 불도도 생활 속에서 은연중 익힌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대원사에 살 때였습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와 법당 기둥에 부딪쳐 죽었습니다. 작은형과 저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오시더니 까치의 주검을 조심스럽게 거두었습니다. 그리곤 극락세계에 갈 수 있도록 땅에 잘 묻어주고 제사까지 지내주며 다음에는 훌륭하고 착한 사람으로 태어나길 저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3형제가 식사를 했는데 다 비운 그릇에 몇 알의 밥풀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설거지를 한 개수대에 가라앉은 그 밥풀들을 한 알도 빠뜨리지 않고 건져서 드셨지요.

여전히 그리운 어머니 , 그림은 나를 성찰하는 수행

3형제 중 하나쯤 출가하기를 바라셨던 어머니는 아마 여러 가지 면에서 제가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하시고 어렸을 적부터 일부러 훈련을 시키지 않았나 싶습니다. 출가하고 보니 어린 시절 제가 집에서 했던 일들은 곧 승가 생활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제가 모신 부처였습니다. 또한 출가 후 10년 동안 승려 생활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정신적 지주였습니다. 그런 어머니도 지금은 저와 같이 수행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소원하고 꿈꾸어 오던 출가를 3형제 뒷바라지를 다 마친 후 하게 된 것입니다.

승가의 삶은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게 원칙이지만 저는 지금도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저의 출가를 누구보다 기뻐하셨던 어머니, 해인사 강원(講院) 생활 당시 초콜릿을 보내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저는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으로 삭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동자승을 화폭에 담는 계기가 되었지요. 말하자면 동자승 그림 연작은 저의 추억이며 일기인 셈입니다.

사실 출가한 후 저는 출가 전에 가졌던 꿈들이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불가에서의 수행이란 남이 아닌 나를 제대로 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나를 알고 마음을 비우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임을 안 것이죠. 그렇게 보면 수행에는 이기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마음 비우는 일에 정진해야 할 제가 붓을 잡은 것은 그림 그리는 일도 하나의 수행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입니다. 부처를 닮은 동승의 맑은 눈동자를 그리며 저는 저대로 마음을 닦고, 전시회를 통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사람들 대로 자신을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행이 되리라 판단한 것입니다.

첫 전시회는 제가 다녔던 중앙승가대 이전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열렸습니다. 과연 작가도 아닌데다 나이마저 어린 승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올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려와 달리 전시 기간 10일 동안 무려 1만5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 화랑가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게다가 전시한 1백여 점의 작품이 모두 팔리는 기록까지 세웠지요. 덕분에 2천만 원이라는 학교 이전 재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초청을 받아 수차례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덕분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를 화두로 마음을 다스리곤 합니다. 그리고 판매로 생기는 수익은 도량을 짓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생활 속의 기도와 좌선으로 저를 승가에 깃들이게 했듯이 저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밖에서 바라보기에 높아만 보이는 불가의 벽을 허물고 스님들을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삶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티없이 맑고 천진난만한 동승을 보며 각자 마음 속에 자기만의 부처님을 모실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 주부생활 8월호 기사전문 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