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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다빈치 "최후의 만찬"

2016.01.04 19:49

구인회 조회 수:751

lastsupper-fluteis.jpg

레오나르도다빈치 "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1495~1498, 산타마리아 델라그리치 수도원 식당 벽화

 

 

                                                       

                  

                   레오나르도다빈치 "최후의 만찬"   


 

 "그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고 있을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지금 나와 식사하고 있는 너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그 순간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제자들은 근심스럽게 저마다 물었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 열두 사람 중에 하나인데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마가 14:18~20)"

 

 모든 일에는 다 인과관계가 있듯이 밀라노의 영주 루드비코 스포르차는

누구보다도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 사건은 자신에게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1495년 당시 조선시대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된 세조처럼 밀라노의 영주였던 루드비코 스포르차 역시 조카를 밀어내고

영주가 된 야심찬 권력자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황금기에 루드비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 브라망테에 의해 지금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산타마리아 델라그라치 성당을 증축하게 하고, 레오나르도다빈치에게는 델라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화를 그리게 합니다.

이렇게 그려진 그림이 바로 불후의 명작으로 탄생한 최후의 만찬.

어쩌면 루ㅡ비코는 통치자답게 십자가 죽음이전 제일 의미있는 사건으로 최후의 만찬을 의식하고 배신의 아이콘 유다와 같이 자신을 파괴할 배신자가 등장할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 

수도사들은 수도원 식당에서 이 그림을 보며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실제 수도사들은 최후의 만찬 현장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을 겁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기다림이 있는 만찬의 자리 예수님의 갑작스런 배신에 대한 선언 앞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의 감출 수 없는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고,  본디 성격대로

놀라움과 두려움,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개성이 다빈치의 붓 끝에서

여과 없이 되살아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찰나의  순간에 표출되는

인간의 심성을 감추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정점으로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을 바로 오른쪽

옆에 그렸고, 그분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듯이 여성 처럼 곱게 그린 반면,

욱하는 성질이 있는 베드로는 요한이 예수님의 절친이라고 의식해서인지

요한의 귀에 대고 "마치 배신자 누구냐?"고 물어보고 있고, 한쪽 손에는

나이프를 들고 방어와 공격을 하는 자세를 보이는 데, 이 베드로의 태도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는 예수 말씀이 자신하고 전혀 상관 없는 일로 여겼던 것처럼 갯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자의 귀를 자른 것처럼 들고 있는 나이프가 "나는

절대 배신자가 아니다."라고 오버액션하며 강력하게 항변하는 듯합니다.

 

베드로 옆에 유다는 그 자신이 제자들 중에 돈 관리를 하던 자라듯이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오른손으로 돈주머니를 움켜주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으로 말미암아 도덕이 파괴되고 인간성을 잃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돈주머니를 빼놓지 않고 살린 것은 고작 은전 30량에

예수님을 팔아 넘긴 배신자가 유다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른편으로 유다 옆에 제자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 열 손가락을 펴서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저는 절대 아닙니다."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 옆은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왜 동생에다 대고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내 동생은 절대 예수를 배반할 사람이 아니라고

따져 묻고 베드로에게 성가시게 굴지 말라고 대변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맨 오른편 끝에 식탁을 집고 일어선 이는 는 바돌로메, 나다니엘

하느님의 선물이란 이름처럼 조용히 말씀을 청강하고 공부하는  스타일

의 바돌로메 역시 벌떡 일어나기 했으나, 어느 누구도 바돌로메와 눈길

하나 마주치지 않습니다. 그의 성품과 태도가 배신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아이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액션을 보인 것은 예수 말씀이

꽤 신경이 쓰이고 놀라움을 주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 예수님의 왼편에 선 제자들의 지금 이 순간 태도를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왼편에 우선 눈에 띤 인물은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도마는 예수 가까이에서 손가락을 위로 치켜 들며 마치 예수께 확인하듯

배신자가 누구인지 무한히 이성과 논리의 날개를 펴는 듯 합니다. 

다음은 작은 야고보라 불리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작은 일에 충성한

야고보의 동작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도마는 손을 들어서, 작은 야고보는

어떤 비극을 예감하듯 팔을 벌리고 깊음 슬픔에 탄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예수님

다운 제자가 야고보 였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설치기 보다는 조용했고

말하기 보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열심히 주를 따르는 자였다"

이 작은 야고보는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게 되는데 쉽게

죽지 않자 톱으로 잘라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자리에 함께 있었던 마리아

이고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 힘썼던 그의 성격으로 볼때 진실한 자로서

예수님의 그 어느 말씀이나 진실로 받드는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빈치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거룩한 사도의 교회'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 중에 가장 잘 생긴 자로 화폭에 그려 넣습니다.

이어서 빌립, 예수를 바라보며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자신의 진실을 알아

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의 빌립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지요.  

다음은 세리 레위, 마태입니다. 마태는 옆의 동료들에게 얼굴을 돌리고

손은 예수를 향합니다. " 예수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야?

우리를 못믿는 거야? 이 분이 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

그 옆에 작은 유다로 불리는 이름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 다대오입니다.

"주여 왜 자신을 우리에게만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으셔요"

유일하게 요한복음에 한 번 등장하는 다대오 사도의 물음입니다.

우리 같은 작은 이에게만 나타나지 마시고 이 세상에 힘을 보여주시라는

다대오의 소망도 이 순간에 역시 가차 없이 무너져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혁명가 열혈당원 시몬, 삶이 과격한 자에게 있어

예수의 말씀은 자극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배신할 사람이

있어, 너무 앞서 나가신게 아니야?" 별로 흔들림 없는 시몬에게 동요를

찾아 보기 힘듭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니까요.

이렇게 레오나르도다빈치는 적당한 색채와 명암, 그리고 깊은 사색으로

1,500년 전 마지막 만찬장 인물들의 성격과 특징을 되살려 냈습니다.

 

소설가 마테오 반델로는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고 느낌을 표현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날은 종일 붓을 내려놓지도 않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또 어떤 날을 4일 내내 붓은 들지도 않고

그림 앞에서 팔짱을 끼고 인물들을 관찰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영감이 올라오면 발판으로 올라가서 붓을 들고

그림 앞에 다가가 화폭에 한 두 곳 가볍게 터치만 하고 내려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작업 속도가 늦어지면서 최후의 만찬 벽화는 천신만고 끝에

3년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이것도 레오나르도는 더 시간을 두고 역작을

완성하려고 했는데 그림을 의뢰한 장본인이자 레오나르도에 돈을 대고

있던 루드비코 공작의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혀 서둘러 그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루드비코는 빨리 건조시키기 위해 화로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렇게 거장의 사색과 창조성에 영주의 조급증이 더해져 회화 역사상

프레스코 기법의 가장 의미 심장한 그림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유럽의 귀족들은 국경 넘어 이태리의 수도원까지

방문할 정도로 가장 센세이션하고 감동적인 그림이 "최후의 만찬"입니다.

 

이 그림 속에 유다는 도무지 배신자인지 그냥 애제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과 수제자 베드로와 같은 한 그룹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의 용모 답지 않게 유달리 검은 피부에

턱이긴 인물로 표현한 유다는 동일 그룹뿐아니라 모든 이에게 배제되고,

본인 조차도 이 만찬의 자리가 부담스러운 든 빗겨져 있습니다.

마치 사랑받지 못한 사람에게 나오는 현상이 소외와 배신이라는 듯이요.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과 사랑받지 못한 제자 유다는 같은 자리에서도

각기 다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이 2,000천 년전의 그날만이라고 국한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순간 오늘날 현실도 저 그림의 인물군처럼 사랑받는 자의 기쁨과

사랑받지 못한자의 슬픔이 각기 다른 표정과 태도, 서로 이질적 인생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레오나르도 평생 최고의 역작인  최후의 만찬은 누구를 비판하고 잘못을

들춰내기 위함이 아니라 과거생을 넘어서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에도 

어떻게 살 것인지 똑 같은 물음과 답변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요한도 되고 유다도 될 수 있는 처지에서 "너는 누구인가?"

모든 사도에 대한 예수의 기대가 그러 했듯이 레오나르도다빈치 역시

신앙의 진실을 추구하는 외로운 구도자 처럼 예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예나 지금이나 흔들리고 죄 짓고 배반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사람들,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이 땅에 그의 마지막 친구로 존재하며,

지금 죄와 어둠속에서 벗어나 그 자신에게로 돌아와 하느님의 선물인

인류가 뜨겁게 사랑받는 사람로 그분의 마지막 성찬에 초대 받기를

간절히 원하며, 온갖 정성과 집념 그리고 위대한 열정으로

인간의 벽화에 성스러운 사색의 씨앗을 파종한 것은 아닐런지요. 

 

 

                                             'sial('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