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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갈, '흰색 십자가 책형', 1938, 캔버스에 유채, 155 x 139.5cm, 시카고, 아트 인스튜트.

 

                                                       

                  

          샤갈 Chagall 의 "하얀 십자가 처형(Crucifixion)"


이 작품을 소장한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측에 따르면

교황은 지난 2.10일 제5회 이탈리아 전국 카톨릭교회 대회 참석차

피렌체를 방문한 길에 피렌체 대성당 맞은 편에 있는 성요한 세례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애호작 마르크 샤갈의 '하얀 십자가(Crucifixion)'를

직접 관람했다고 합니다.

 

러시아 유대계 출신의 ‘파리파’(Ecole de Paris) 화가 샤갈이 그린 이 유화 작품은 지난 15. 9. 24일부터 16.1.24일까지 피렌체의 스트로치 궁전에서 열리는 종교미술 특별전 ‘신성한 아름다움(Divine Beauty) 반 고흐부터 샤갈과 폰타나까지’에 대여 중이며, 가톨릭 교회 대회 기간(11월9일~13일) 한시적으로 성 요한 세례당에 전시됐습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 추기경 시절, 샤갈의 ‘하얀 십자가’를 애호작으로 꼽으면서 “십자가 처형을 잔혹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표현했다. 평정심을 가지고 고통을 묘사했다. 내게는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교황은 샤갈을 ‘유대인이면서도 예수의 존재를 믿은 사람’으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한편 프란체스코 교황은 2013년 가톨릭 매체 ‘내셔널 가톨릭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화가로 미켈란제로 드메리시 카라바조를,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샤갈의 ‘하얀 십자가 처형’을 꼽은 바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마으크 샤갈의 '하얀 십자가(Crucifixion)처형, 1938년 작

     못 박힌 예수는 고통받는 예수의 자화상이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표상과

같은 것입니다.  나치의 만행으로 죄 없는 사람이 이유 없이 고통당하고

죽어야만 했던 비참하고 암울한 유대인의 현실에 대응하여 아무 말 없이 이 상황을 지켜보며 세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는 예수님의  슬픈 침묵.

별로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그 옛날

죄 없는 예수를 죽음의 낭떠러지로 떠밀었던 그들에게 일 순간 다가선

십자가 책형이 남의 일화가 아닌 바로 자신과 자기민족에게 들이 닥친

고난으로 십자가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을 바로 자신의 죽음입니다.

 

그림 우편 상단의 화염에 휩싸인 유대 회당 위 리투아니아 국기를 보면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수십만명의 유대인들의 수난을 연상할 수 있듯이

마르크 샤갈은 러시아에서 태어난 리투아니아계 유대인 화가로 그는

1889년 오늘의 리투아니아 국경에서 멀지 않은 러시아의 비테브스라는

조그만 촌락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해산물 창고의 사무원, 모친은 잡화상 점원으로 일했다고

하며 9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찌들린 가난을 겪었던 자기 고향의

모든 것을 일생동안 사랑했으며, 이 고향에서의 사랑과 추억이 분노와

원망이 아닌 그의 작품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소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유대 박해가 최고조에 이를때 세계 곳곳에서 어이없이 벌어진

    유대인이 겪는 고통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비유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얀 십자가 처형은 터번을 두르고 유대인처럼 전통 기도복인 탈리스를 

    걸치고 있는 예수가 그림 중심에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는 점에 대하여

    여타의 십자가에 못박힌 작품들과 특별한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주변에는 당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파괴와 만행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는 나치 군인이 유대회당(시너고그)을 난입하여 불을

    지르고 파괴와 약탈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붉은 공산당 기를 보면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나치의 폭압에

    이은 구 소련 공산당의 유대인 탄압을 의미합니다. 역시나 마을 전체가

     불 타고 있고 노아의 홍수를 만나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큰 배, 내 팽겨진

     경전 토라(Torah), 토라를 부둥켜 안고 황급히 달아나는 자,

     심지어 유대민족의 대예언자 초록 옷을 입은 엘리야 마저 민족을 떠나

     탈출을 감행하고야 맙니다. 유대 랍비ㅡㄹ과 선조들의 혼령들은 예수의

     머리 윗 부분에서 방황하면서 민족사의 아비규환을 절규하고 있습니다.

     한편 그림을 통해서 종교가 아닌 샤갈의 가슴을 느껴볼 수 있는데,

     경건한 유대교 신자로 살면서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찾았기에 종교의 간극을 벗어난 하늘의 사람으로서 그의 작품은 유대의

     느낌을 지울 수 없으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고통 받는 유대인의

     자화상으로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가로막고 있는 울타리를 허물고 예수의

     사랑과 평화를 통해 만방에 드러난 하나님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경계를 벗어나 하나님을 확인하는 용기있는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 중앙에 예수는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수난을 침묵으로 저항하고

     있으며, 대학살로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비극을  자신의 죽음처럼 처절

     하게 견디고 있습니다 . 샤갈은 그렇게 죽은 예수에게서 민족의 동질성을

     느꼈으며,  이 시대의 십자가 죽음을 민족사적 죽음으로 연대하고 있으며,

     온통 사방에 시시각각 밀려오는 피비린내 나는 한 인간의 고통 앞에서

    숨가빠오지만 예수의 발 밑에 촛불은 여전히 불빛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의 죽음이 곧 부활을 의미하듯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서로

    번갈아 가면서 피묻은 십자가를 가슴에 묻는 비극을 종식시킨는 수단

    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슬픈 예수의 마음을 보여주며 사무친 원한으로

    부터 민족의 생명력과 사랑의 기운이 들불처럼 불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의 현존을 이 그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틀에 박혀 갑갑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을 해방시켜 아름다운

    상상과 꿈의 세계로 안내 하는가 하면 저마다의 십자가에 매달린 영혼을

    일깨워 "당신은 사랑이다." 라고 태초에 잊어버렸던 님의 생명의 원기와

    사랑의 색깔을 되찾아 내고 있습니다.

   "인생에서나 예술에서나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 있을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기교이고, 나의 종교이며,

수천 년 전부터 우리에게 전해 온 새롭고도 오래 된 종교이다."

 

 

                                            'sial (2016.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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