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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골고다, 1863~1944

 

                                                       

                           에드바르드 뭉크 "십자가에서 비움  kenosis"

  (요한  19장 31~37절) 


경전에 의하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죄수들을 그 다음날까지 십자가에 달아 두지  않을 작정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의 정수를 기록한 신명기 21장 22~23절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무서운 죄를 지어서  너희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처형한 다음 그 시체를 나무에 어두울때까지 달아두지 말아라. 그런 시체는 반드시 그날 해지기 전에 매장하여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 땅에 재앙을 불러 올 수 있다.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그 땅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가서 그 죄수들이 죽어야 시체를 내릴 수 있으니 빨리 죽도록 다리를 꺾으라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청하게 됩니다.

실제로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의 다리를 꺽어 빨리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와서는 이미 숨을 거두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는 대신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옵니다.  물과 피는 인간의 구원의 성취를 의미함이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나무 위에서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느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해 놓으신 인류의 구원의 역사가 예수님의 비움(KENOSIS)으로 인하여 시작되고 있음을 이날의 골고다 형장에서 피와  물의 상징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라고 경전은 말씀하고 계신 즉 자칫 그리스 로마의 이원론적 신관에 의해서 부정하기 쉬운 예수님의 육신에 깃든 신성에 대하여 예수님의 온전한 비움을 현장에서 본 사람의 증언을 바탕으로 여과 없이 증명하고 있다고 물님은 말씀합니다. 


위 그림은 세기말의 불안 속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극복하고 뜨거운작품으로 승화시킨 시대의 모더니스트,

일상적이고 예측가능한 미의 영토에서 신개념의 미의 영역을 표현하여  미술사의 흐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골고다. 

그의 남다른 예민한 감각으로 색채들이 비명을 지르고 피빛으로 일렁이는 하늘을 마치 비명소리를 시각화 것처럼 그린 시대의 문제작 절규를 통해서 현대인의 불안한 영혼에 깊은 울림을 전한 것처럼 뭉크의 또 다른 수작  "골고다"를 통해서  언제 꺼질 지 모르는 피묻은 자신의 목소리와 이 순간 살아있는 인간 속에 깃든  방황과 깊은 소외를 찾게 됩니다.

두려움과 죽음앞에 촛불처럼 일렁이는 골고다, 생의 언덕에서 괴로웠던 사나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뭉크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청색을 배경으로 전혀 성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나신의 주홍빛으로 못 박혀 있고 영혼 없는 군중을 향한 연민과 자비가 십자가 앞에 선 무지한 군중들에게 알알이 맺혀 있는듯 보입니다.  오직 하늘 만이 이날을 애곡하는 것처럼 예수가 흘린 피는 잿빛 구름이 되어 저물어 가는 저 하늘을 휘돌아 돕니다.

그러나 노동과 일상 속에 지쳐있는 군중에게 있어 이날의 비참한 죽음의 현장은 단지 죄인의 죽음이자 타인의 일일 뿐입니다. 그들은 타자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관심과 무감각으로 울고 웃을 뿐이고 무의미한 고독과 소외의 극한 지대를 넘실대고 있는 그야말로 군중의 모습이자 또 자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군중 속에서 예수님의 발 밑에 아수라백작과 유사한 인물은 폴란드 출신 문학가 프비지셰프스키,  왼편에 길다란 얼굴과 수염이 돋보이는 인물은 뭉크를 예술세게로 이끈 화가이자 사상가 크로스티안 크로그이며, 프비지셰프스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창백한 인물은 바로 젊은 시절의 뭉크 자신입니다.  무슨 아픈 사연이 있는 양 흙빛 얼굴로  뭉크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인물은 뭉크를 키우고 뭉크로 이끌어낸 이모 카렌, 마치 형장에 계셨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처럼 가장 한스럽고 절규하는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뭉크를 죽음과 절망으로 부터 벗어나 신의 형상이 담긴 축복받은 길로 이끌고자 한 사람에 대한 기대와 그 시대를 향한 여인의 아픔과 괴로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뭉크는 그의 일기에서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나의 요람을 둘러 안고 있는 검은 천사였다.

아울러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여인에 대한 세가지 상이 있어 삶을 갈망하는 여인, 꿈꾸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으로 구분하여 남녀는 서로 만나서 끌리지만 상호 결합될 수 없는 원소와 같다,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나 철저하게 누여겨 보아야하는 스핑크스이자 수수께끼이다. 세기말 결핵으로 생을 마무리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랄까,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산 에드바르드 뭉크, 마지막 피 한방울 물 한방울을 다 쏟아내 마침내 그 비움에 인류의 구원을 담아낸  십자가의 죽음과 각자의 죽음 속에 있는 인간의 군상을 회화를 통해서 드러낸 뭉크의 생의 외마디 절규! 죽음이란 무엇인가?


뭉크는 인간의 상처받고 무기력하여 신의 자비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는 내면을

명료하게 들여다 본 끝에 끝내 소외와 고통, 불안을 비워내고(KENOSIS )

       죽음 넘어 허리케인처럼 꿈틀거리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치열한 아픔을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끌어 올려

       소외된 사람의 마음에 위로를 주고 인간의 황무지 같은 정신의 경계를 넘어

       미술사에 무한한 표현주의의 커다란 지형을 형성하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시작이며 새로운 결정의 시작이다.

     우리들이 죽는 것이 아니고 세계가 우리로부터 사라져 가는 것이다."


                                                          'sial ('17.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