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1221027
  • Today : 85
  • Yesterday : 200


Peter_Paul_Rubens_082.jpg


[Peter Paul Rubens(1577-1640),The Defeat of Sennacherib, 1616-18, oil on panel 98x123cm]


기원전 705년부터 기원전 681년까지 산헤립은 앗시리아의 왕으로서 군 지도자들과 함께 유대 정복전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둠의 깊은 곳에서 번쩍이는 불빛의 한 가운데, 천둥으로 무장한 네 천사가 하늘에 나타난다. 온 군대를 이끌고, 왕의 말을 타고, 산헤립은 그의 갈기를 꼭 붙잡지 않으면 벼락맞아 죽거나 낙마할 듯 하다. 그의 용사들은, 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로 질주할 때에, 그의 주변에 있는 먼지 속에서 뒹굴고 있다. 죽은 자와 부상당한 자들이 땅바닥에 무더기로 누워 있다.

그것은 전례 없는 혼란과 무질서가 있는 장면이다. 기수의 고통과 말의 공황은 가장 대담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표현된다. Sennacherib의 말은 뒷다리로 거의 수직에 가까운 위치로 기어들어 그의 앞발로 공중을 미친 듯이 때리고 그의 갈기와 꼬리는 마구 뒤척인다. 날고 있는 또 다른 말은 뒷발을 너무 높이 던져서 마치 공중제비를 가장 앞쪽으로 돌려야 할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코와 콧구멍을 가진 코는 치명적인 몸서리치는 공포에 질려 팽창했다. 말 타는 사람들은 이 상황이 두려운 나머지, 혼란스럽고 이순간 이자리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산헤립(Sennacherib) [달의 신(神)]이 나​에게 형제​들​을 증가시킨다]


사르곤 2​세​의 아들​인 아시리아​의 왕. 산헤립(센나케리브)은 아버지​로부터 막강​한 제국​을 물려받았지만 통치 기간​의 대부분​을 반란—특히 바빌론 도시​를 둘러싼 반란—을 진압​하는 데 보내야 하였다.

산헤립​은 그​의 아버지​가 통치​할 때 아시리아​의 북쪽 지역​에서 총독​이나 장군​으로 일​했던 것 같다. 산헤립​이 왕위​를 계승​한 후 그 지역​은 거의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것 같으며, 문제​는 주​로 남쪽​과 서쪽​에서 발생​하였다. 칼데아 사람 므로닥-발라단(사 39:1)

그런 다음 산헤립​은 자기​가 “3​차 원정”이라고 부른 원정​에서 “하티”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였는데, “하티”는 당시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근동 문헌」 Ancient Near Eastern Texts, J. 프리처드 편, 1974​년, 287​면) 그 지역​은 전반적​으로 아시리아​의 지배​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 역시 그러한 지배​를 거부​한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왕둘 18:7)

히스기야 제​14​년(기원전 732​년)에 산헤립​의 군대​는 서쪽​으로 진격​하여 시돈, 악십, 악고​와 같은 페니키아​의 해안 도시​들​을 함락​시킨 다음 남쪽​으로 향하였다. 모압​과 에돔​과 아스돗​을 포함​하여 두려움​을 느낀 나라​들​은 복종​을 표​하기 위해 조공​을 보낸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완강​하게 저항​했던 아스글론​은 인근 성읍​인 요파​와 벳-다곤​과 함께 무력​으로 점령​당하였다. 아시리아​의 한 비문​에서는 블레셋​의 도시 에그론​의 주민​들​과 귀인​들​이 그​들​의 왕 파디​를 히스기야​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비난​하는데,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그​를 부당​하게 감금​하였다”고 말​한다. (「고대 근동 문헌」, 287​면. 왕둘 18:8)

성서 기록​에서는 이 무렵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하였으며 많은 요새 도시​들​과 성읍​들​을 포위​하고 함락​시켰다고 알려 준다. 히스기야​는 이제 라기스​에 있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에게 전갈​을 보내어 그​가 부과​하는 액수​의 조공​을 바치겠다고 제의​하였다. (왕둘 18:13, 14)

성서 기록​에서는 파디 왕​이—그​가 정말​로 히스기야​의 포로​였다면—그때 풀려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히스기야​가 산헤립​이 요구​한 조공 은 300​달란트(약 198만 2000​달러)와 금 30​달란트(약 1156만 달러)를 냈다는 점​은 분명​히 알려 준다. (왕둘 18:14-16왕둘 18:17-35)

아시리아​의 사절단​이 산헤립​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립나​를 대적​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디르하가​와 관련​하여 ‘보십시오, 그​가 당신​과 싸우려고 나왔습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왕둘 19:8, 9)


여호와​께서 산헤립​의 군대​를 무찌르시다


예루살렘​과 관련​하여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유다​의 수도​를 점령​하고자 하는 자기​의 결의​를 접은 것​이 아니라고 경고​하는 협박 편지​를 보냈다. (사 37:9-20) 아시리아 사람​들​의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이고 산헤립​이 “수치​스러운 얼굴​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사 37:33-37; 대둘 32:21

산헤립​의 비문​들​에서는 그​의 군대​에게 닥친 이 재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잭 피니건 교수​가 말​한 것​처럼, “아시리아 왕​들​의 비문​들​은 전반적​으로 과시​하는 조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 산헤립​이 그러한 패배​에 대해 기록​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대​로부터의 빛」 Light From the Ancient Past, 1959​년, 213​면) 하지만 산헤립​이 이 사건​에 대해 제시​하는 설명​을 유의​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설명​은 시카고 대학교 오리엔트 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는, 산헤립 각주 비문​으로 알려진 것​에 새겨져 있다. 산헤립​이 한 말​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 히스기야​는 나​의 멍에​에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의 견고​한 도시 46​개​와 성벽​이 있는 요새​들​과 그 인근​의 무수​한 작은 마을​들​을 포위 공격​하였다. 잘 다져진 (흙) 경사로​들​과 (그렇게 해서) (성벽) 가까이 끌고 온 공성퇴​들(과 더불어) 보병​들​이 공격​을 하고, 갱도​와 성벽​의 갈라진 틈​과 공병대​의 작전​을 (활용​하여) (그곳​들​을) 정복​하였다. 나​는 (그곳​들​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20만 150​명​의 사람​들​과 말, 노새, 당나귀, 낙타, 크고 작은 가축​들​을 셀 수 없이 끌어냈고 (그것​들​을) 전리품​으로 여겼다. 그 자신[히스기야]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내​가 그​의 왕도​인 예루살렘​에 갇히게 하였다. ··· 내​가 약탈​한 그​의 성읍​들​은 그​의 나라​에서 떼어 내어 아스돗 왕 미틴티​와 에그론 왕 파디​와 가자 왕 실리벨​에게 주었다. ··· 히스기야 자신​은 ··· 나중​에 나​에게 나​의 위엄 있는 도시 니네베​로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보석, 휘안석, 큰 적석(赤石) 덩어리, 상아(로 상감 세공​한) 침상, 상아(로 상감 세공​한) 니메두 의자, 코끼리 가죽, 흑단, 회양목​을 비롯​한 온갖 값진 보물​들​과 함께 (자기​의) 딸​들​과 후궁​들​과 남녀 악사​들​을 보냈다. 조공​을 바치고 종​으로서 경배​하기 위해 그​는 (자기​의) 사자​들​을 보냈다.”—「고대 근동 문헌」, 288​면.


자랑​으로 가득 찬 이 설명​에서는 보내온 은​의 수량​을 300​달란트​에서 800​달란트​로 부풀리고 있는데, 지불​된 조공​과 관련​된 다른 세부 사항​들​도 틀림​없이 그처럼 과장​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다른 부면​에서는 성서 기록​을 놀랍게 확증​해 주며,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점​으로, 산헤립​은 히스기야​가 조공​을 바친 일​이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에 대해 포위 공격​의 위협​을 가한 후​에 있었던 것​으로 묘사​하는 데 반해, 성서 기록​에서는 조공​을 바친 일​이 그 전​에 있었다고 알려 준다. 그처럼 사건​들​의 순서​가 뒤바뀌어 나오는 것​에 대한 개연성 있는 이유​에 관해 「펑크 앤드 왜그늘스 신 표준 성서 사전」(Funk and Wagnalls New Standard Bible Dictionary, 1936​년, 829​면)에서 한 이러​한 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산헤립​이 벌인 이 원정​의 결말​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명확​하지 않다. 그​가 에그론​을 함락​시킨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는 ···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자기​의 연대기​에서 산헤립​은 그​가 히스기야​를 처벌​하고 유다 나라​를 공격​하고 유다​의 영토​와 도시​들​에 조처​를 취한 시점​이 이때​라고 알려 준다. 사건​들​을 이러​한 순서​로 배열​한 것​은 그​가 밝히고 싶지 않은 어떤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인 것 같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은 하느님​께서 그​의 군대​에 재난​을 내리시자 서둘러 니네베​로 돌아갔다. 그렇기 때문​에, 순서​를 뒤바꿔 놓은 산헤립​의 기록​에서는 자기​에게 편리​할 대로, 히스기야​가 특별​히 사자​를 보내 니네베​에서 조공​을 바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점​으로, 역사가​들​은 산헤립​의 통치​가 그 후​로도 20​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주장​하는데도, 고대​의 비문​들​과 기록​들​에는 산헤립​이 또다시 팔레스타인 원정​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기원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그 사건​에 대한 바빌로니아인 역사가 베로수스(기원전 3​세기​의 인물​로 추정)의 기록​으로부터 인용​하였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나케리모스​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랍사케스 휘하​의 군대​가 역병​으로 인해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그​의 군대​에 전염병​을 가져오셔서, 포위 공격 첫날 밤​에 18만 5000​명​의 병사​가 지휘관​들​과 장교​들​과 함께 죽었던 것​이다.” (「유대 고대사」 Jewish Antiquities, X, 21 [i, 5]) 일부 주석가​들​은 이 재난​을 기원전 5​세기​에 헤로도토스(II, 141)가 기록​한 내용​과 연관​시켜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 기록​에서 헤로도토스​는 “어느 날 밤, 엄청​난 수​의 들쥐​들​이 아시리아 진영​으로 떼지어 몰려와 그​들​의 화살통​과 활​과 방패 손잡이​를 먹어 치워 버렸”고, 그리하여 그​들​은 이집트 침공​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기록​은 분명 성서 기록​과 일치​하지 않으며, 또한 아시리아​의 이 원정​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설명​은 아시리아​의 비문​들​의 내용​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베로수스​와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산헤립​의 군대​가 이 원정​에서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하여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하지만 산헤립​의 걱정거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시리아​로 돌아온 후 바빌론​에서 므로닥-발라단​이 선동​한 또 다른 반란​을 평정​해야 하였다. 산헤립​은 이번​에는 자기​의 아들 아슈르나딘슈미​를 바빌론 왕​으로 앉혔다. 육 년 후​에 산헤립​은 엘람 사람​들​을 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였지만, 얼마 있지 않아 엘람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함​으로 그​에 대해 보복​하였다. 그​들​은 아슈르나딘슈미​를 포로​로 잡고 자기​들​의 왕​을 바빌론​의 왕좌​에 앉혔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여러 해 동안 이어진 후 결국 격노​한 산헤립​은 바빌론​을 초토화​시킴​으로 복수​를 하였다.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거룩​한 도시”의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것​은 전례​가 없는 행동​이었다. 산헤립​의 통치​의 나머지 기간​에는 큰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헤립​은 예루살렘 원정​이 있은 지 약 20​년 후​에 죽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숫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기록​들​에 근거​한 것​인데, 그러한 기록​들​이 신뢰​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성서 기록​에서는 산헤립​이 니네베​로 돌아간 즉시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그​가 자기 신[니스록]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라트 땅​으로 도망​쳤다. (대둘 32:21; 사 37:37, 38Ancient Records of Assyria and Babylonia), D. 루컨빌, 1927​년, 2​권, 200, 201​면. 에살-핫돈


건축 공사

그처럼 아시리아 제국​은 산헤립​의 통치 때 별달리 영토​가 확장​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수도​의 위치​로 회복​시킨 니네베​에서 야심 찬 건축 공사​를 벌였다. 산헤립​이 그곳​에 세운 거대​한 궁전​은 홀​과 뜰​과 의전용 방​들​로 이루어진 복합 건물​로서, 길이​가 450​미터​에 폭​이 210​미터​에 달하였다. 그​는 고멜 강 위​로 예르완 수로교​로 알려진 고가 수로​를 건설​하여 48​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 왔다. 그 물​은 정원​들​과 공원​들​의 관개​에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해자​를 채워서 그 도시​의 방어 기능​을 강화​하였다.


다윗의 길로 간 히스기야에게 시험이 찾아 왔다. 히스기야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신흥 강국인 앗수르의 산헤립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 국가를 계속 침공했고, 식민지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유다를 공격했다. 1차 침공에서 패배한 히스기야가 자신들이 앗수르를 배반 한 것(7절)과 이번 공격에 저항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하고,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 줄테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산헤립은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요구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왕궁 곡간과 성전 곡간의 금은을 다 모아서 주었고, 부족하자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긁어모아서 줬다. 산헤립이 돌아갔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산헤립이 2차 공격을 해 왔다. 산헤립은 2차 공격에서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라는 장군을 내세웠다. 이 중에서 랍사게 장군은 심리전에 능한 사람이었다. 랍사게 장군 일행은 대군을 이끌고 ‘라기스’로부터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왔다. 유다의 군대는 앗수르를 대적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히스기야 왕 측에서는 왕궁 책임자인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지휘관으로 나섰다.
앗수르 군대의 랍사게 장군이 먼저 심리전에 나섰다. 랍사게는 앗수르 군대과 유다의 군대가 다 듣도록 일장 연설을 시작 했다. 랍사게는 유다 측 장군들을 지목하면서 말했다. “너희는 가서 히스기야 왕에게 전해라, 히스기야 왕이 누구를 믿고 앗수르를 반역했느냐? 히스기야가 믿고 있는 애굽(바로 왕)은 가시나무와 같다, 그것을 믿다가는 찔린다. 손해만 볼 것이다. 또, 너희가 믿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믿을 신이 못된다. 너희는 여호와를 믿고 전쟁에 나와서, 우리 중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장교 하나과 싸워서도 이길 수 없다. 내기를 하자, 단 한 명이라고 우리에게 말 타고 달려와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병사가 있다면, 말 2천마리를 주겠다. 절대로 못할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희(유다)들이 믿는 여호와의 뜻을 따라서 온 것이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가 전(前)에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유다를 쳐서 멸하라 하셨다(거짓말, 조롱).”
랍사게의 말은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양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싸우기 전에 벌써, 앗수르 군대의 사기는 올라가고, 유다 군대의 사기는 저하되었다. 심리전의 효과 였다. 유다 측 대표들이 랍사게에게 요청했다. “이런 일은 대표단 끼리 따로 만나서 대화를 통해 협상합니다. 그리고, 우리 측 군대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공식적인 국제 언어인 ‘아람어’로 말씀해 주십시오.”(당시 유다인들은 아람어를 대부분 알아 듣지 못했다)
랍사게가 말했다. “내 주 앗수르 왕이 히스기야 왕과 너희 대표단에게만 이 말을 전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다. 너희 왕과 대표단,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너희 모든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보낸 것이다.” 랍사게는 오히려 더 크게 유다의 언어로 유다의 군대들에게 소리 질러 말했다.
“유다의 백성들이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의 왕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너희가 믿는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해 줄 수 없다. 히스기야의 말은 다 거짓이다. 너희는 우리 앗수르 왕의 말을 듣고 항복하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너희 동족(同族)인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너희들을 모두 더 좋은 곳으로 집단 이주 시킬 것이다. 그곳은 먹을 것이 풍부한 곳이다.
히스기야의 말은 거짓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지금까지 싸워 패배시킨 모든 민족들도 다 믿는 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믿는 앗수르의 신에게 패배했다. 하맛, 아르밧, 스발와임, 헤나, 이와, 북 이스라엘(사마리아)의 신들이 다 어디 갔느냐? 다 패배했다. 너희가 믿는 신이 어찌 앗수르의 신을 이길 수 있겠는가? 너희의 초라한 군대가 어찌 우리 앗수르의 대군을 이길 수 있겠느냐? 대답해 보라.”
유다의 군대(백성)들은 잠잠했다. 이들의 마음속은 복잡해졌다. 크게 상처 받은 유다 측 대표단(장군)이 모든 사실을 히스기야 왕에게 보고 했다. 히스기야가 절망에 빠졌다. 전세(戰勢)가 완전히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길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도움이다. 히스기야는 전장(戰場)에서 돌아온 대표단을 그대로 이사야 선지자에게 보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상황을 보고하고, 기도 응답을 받아 달라 부탁했다.
“랍사게가 그의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 때문에 꾸짖으실 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하니라”(4)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 부탁할 때의 내용을 주목해 봐야 한다. 밑줄 친 부분이다. 말라기 3:16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대화를 듣고 그 내용을 기념책에 기록한다고 하셨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랍사게와 유다 대표단 사이의 대화를 들으셨을 것이라고 믿었다. 히스기야는 이런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사43:26 “나로 기억나게 하라”
이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응답이 왔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라”(19:6-7).
앗수르가 다른 나라와 동시 다발적으로 전쟁을 했기 때문에 유다와의 전쟁이 잠시 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다시 불붙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전(前)에 랍사게가 했던 말과 동일한 내용을 적어서 히스기야에게 보냈다. 일종의 선전포고문이다.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갔다. 히기스야는 이 편지의 펼쳐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여러 왕이 과연 여러 민족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고, 또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그들이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하니라.”
적장 산헤립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입장에서 논리가 정연한 글을 썼지만,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입장에서 논리 정연한 기도를 드렸다. 히스기야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20).
하나님께서 이 전쟁은 나에게 속한 것이라 말씀하시고,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직접 개입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와 히스기야 왕이 중보 기도를 통해서, 이 전쟁에 하나님 나라가 개입할 수 있도록 동역자의 역할을 잘해냈다.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결국 쥐때로 인해 폐주가 된 산헤립은 그의 아들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게 칼로 죽임당했다. 이사야서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고 거기에는 그들이 산헤립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한 산헤립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가 소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칼에 죽게 하리라고 예언케 하신 선지지 이사야의 말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출처] 산헤립|작성자 daily message/ [출처]   https://wol.jw.org/ko/wol/d/r8/lp-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