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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8


마태복음 27장 32~6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수난의 기록인 27장을 묵상하다가 몇일 전, 불재 접지장에 자주 찾아오시는 가족과 함께 왔던 사내 아이가 생각났다. 다섯 살쯤 되는 아이는 호기심과 에너지가 넘쳤다. 예배실 옆에 있는 작은 방문을 가리키며 그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방문을 열어서 보여 주었다. 또 그 아이는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가서 피아노를 치라고 했더니 탄력 있는 고무공처럼 뛰면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저래도 되냐고 안절부절하면서 걱정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베토벤을 보는 것 같다고, 피아노는 부서지면 고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보는 아이는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이 살아있는 빛 그 자체의 존재였다. 접지장에서도 쇠갈퀴의 용도를 물었고 낙엽 위에 앉아 즐기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장해 가면서 할머니로 상징되는 지구적 중력에 눌려지고 길들여지다가 창조의 힘과 순수한 빛이 점차 사라져 결국 온갖 쇠사슬에 묶이게 될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 쇠사슬은 주변의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반응으로 익숙해진 습관이고 감정일 것이다. 성격의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 존재의 진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창조 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

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은 수비학적으로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0의 자원이다. 그러나 자신의 자원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에 불행의 감옥을 스스로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다. 수백억 통장이 있어도 비밀번호를 몰라 사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아무런효용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존재의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의 영광과 비참함이 여기에서 갈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 진실은 무엇인가? 예수는 이에 대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이며 인류는 한 형제자매임을 말씀했다. 인간이 만든 계급과 신분에 의해 자행되는 억압이 인간의 신성한 빛을 가리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종교적 권력에 대해 분노하였고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신성한 성전으로서의 존재라고 강조하였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식들인 인간들에게 풍성함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하나님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창조의 불꽃이 타오르는 예수를 유대교의 완고한 틀로서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했다. 예수의 신성한 빛을 율법의 그림자로 덮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유다의 권력자들은 무망한 노력을 다했다. 예수의 수난은 이런 배경이 깔려있다.


@ 모욕과 조롱의 시험대 – 십자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예수는 광야에서 한 달 반 동안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그리스도 의식으로 충만한 예수는 세 가지 유혹의 시험을 받았다. 돌로 빵을 만들라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노라는 악마의 시험을 통과하였다(4:1-11). 그 악마의 시험은 십자가 위에서도 벌어졌다. 예수의 공생애는 시작과 끝에 세 가지 시험이 배치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 군중들은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40) 하고 모욕하였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도 ‘제가 하나님의 아들입네 했으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어디 살려 보시지’하며 조롱하였다(43).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들도 예수를 모욕하였다(44). 대제사장의 조롱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부디 지금 살려달라고 하시지?’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 예수의 삶을 총결산하는 사건이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과 모욕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이었다. 그 참혹한 시험의 통과로 예수는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이 보이는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자신을 조롱하는 인간들을 향해 분노하지 않고 깊은 신뢰심으로 하늘 아버지를 향하여 마지막 기도를 드렸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태복음서는 이 부르짖음을 죽어가는 중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 엘리 아타(Eli atta)

히브리어로 Eli atta는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이다. 그런데 Elia ta로 하면 ‘엘리아, 오십시오’가 된다. ‘아버지가 방에’를 ‘아버지 가방에’로 읽는 것과 유사한 경우이다. 십자가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외침을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바로 이 차이였을 것이다.

십자가로 처형당하는 사람들은 통상 소리를 내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그리스도 예수는 두 번 큰 소리를 내시고 운명하셨다. 마태는 예수의 죽음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졌고 무덤이 열려 성인들의 몸이 살아났다고 기록했다. 이런 표현은 예수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고, 예수의 죽음은 세상을 뒤집는 사건임을 나타낸다.

“주 야훼가 말한다. 나 이제 무덤을 열고 내 백성이었던 너희를 무덤에서 끌어 올려 이스라엘 고국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에스겔 37장 12절 )

모든 존재의 실상과 배후에 있는 사랑의 실상을 깨달았던 예수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사람들은 예수를 심히 마음 아프게 했다. 곧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눈물짓던 예수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시집 <심봉사 예수>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여

  그의 발자국들이 그의 가슴 못자국들이

  가난과 폭력 속에서 뭉개진 재능과 꿈이 보여

  나는 이게 힘들어

  내 설움과 그 사람의 설움이 섞이는 것은

  더욱 서러운 일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 가슴이 공명하는 것

  그의 눈물 그의 빛깔이 되는 것

  그런데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많이 아픈가 봐


  보물창고를 폐품창고로 사용하는 사람이 오늘 찾아왔습니다

  자신의 완고한 껍질을 깨뜨리라는 영혼의 소리를

  그나마 듣기 시작해서 다행입니다

  그런 사람이 왔다간 뒤에는

  눈물이 올라옵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던 세월의 눈물이

  그런데 오늘은 심하네

  내가 아무래도 많이 아픈가 봐


한 송이 들꽃과 공중의 새 한 마리에서 하늘의 섭리를 읽어내고 공감했던 순수한 영혼 예수의 심정으로 완고한 그 세월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헤매었지만 박해자는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로마와 유다의 권력, 그리고 우매한 민중들의 폭력 속에서 부대끼며 참 많은 눈물을 흘리셨겠구나 하는 애잔하고 비통한 마음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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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설한을 견디고 겨우 나왔다고!

가시관처럼 생겼지만 부드럽단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