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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1



히브리서 121-13 기독교는 유신론인가?

 

                                                                           숨 이병창



20대에 읽었던 비교종교학에 불교는 유심론이고 기독교는 유신론이라는 글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특히 되어보기 수련을 안내하면서 그런 류의 유식한 종교학적 언어들이 얼마나 비성서적이고 예수의 복음을 왜곡하는가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과 예수의 하나님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높고 높은 하늘 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는 대상화된 하나님과,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그분과 하나 된 삶을 사는 사람의 차이이다. 이것이 예수를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또한 바울 사도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위한 건물 성전은 이미 갈보리에서 끝이 났다. 하나님의 거처는 건물 성전에서 사람의 몸과 마음으로 옮겨졌다. 예수는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 된 사람들의 제사장이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서가 강조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체결하려는 새 계약은 계약 자체가 완전히 옛것과 다르다. 이 계약은 내가 각 사람과 개인적으로 체결하겠다. 나는 이제 나의 새 계약을 돌판에 써서 그들에게 주지 않고 그들 각자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 놓겠다. 나는 이렇게 내 법을 가슴 새겨 놓고 그들의 부드러운 살과 핏속에 넣어주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도록 하겠다. 그러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필요가 없고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가장 천한 사람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810-11, 12-13절 참조)

 

@ 하나님은 인간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유신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머물러야 할 인간의 마음자리를 부정한 말이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르는 사고이다.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드러난 복음은 바다의 물고기처럼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대상화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념의 영역이다. 내 안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깨달음과 각성을 통한 사랑과 은혜의 영역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집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신성의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빈집일 뿐이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잃어버린 비존재이다. 이런 관점에서 유심 안에 유신을 담아야 한다. 이것이 종교와 실존을 완성하는 길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는 열한 살 때까지의 삶을 그려낸 자서전 Les Mots’(1964)을 발표하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지만 수상을 거부했다. 그가 무신론자로서의 자신을 표현하면서 우리는 신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다. 그의 현존은 우리를 대상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인간의 설 자리를 삭제한 유신론에 대한 반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히브리서를 읽었더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관념의 하나님, 내 생각으로 믿어주는 하나님이 죽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들의 백합과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고 예수는 말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들꽃과 새를 통해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밭에 심어진 밀알과 같다고 예수는 말씀했다. 밀알의 형상을 버린 밀알일 때 성장이 일어난다. 그 성장은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발아되고 개화되고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과정이고 믿음 생활을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 밀알 속의 생명을 찾는다고 잘라내고 깨뜨린다면 거기에 현미경을 들이댄다면 생명은 사라지게 된다. 믿음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마음의 여행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여행의 동반자가 누구인가이다.

 

@ 믿음 시련과 인내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은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한 사람들이었고 믿음의 힘으로 온갖 시련을 극복해간 사람들이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경기에 참여한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다. 지구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각자에게 훈육의 과정을 통하여 연단하신다. 시련이 올 때 그것을 견디고 통과하는 일이 심히 어렵겠지만 하나님이 나를 성장시켜 주시기 위해 찾아온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삶은 또 다른 얼굴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선수는 꾸준히 목표지점까지 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야 한다. 낙심과 절망과 유혹을 떨쳐 버리고 목표지점인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야 한다. 예수는 치욕스러운 부끄러움도 인내하면서 십자가까지 견디어 승리하셨다. 지금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가? 지금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 일을 바라보고 반응하고 있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시련이 찾아올 때 그것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훈육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한 사람들은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신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저자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소중하게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평화라는 믿음의 지혜를 전하고 있다. 결국 믿음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밑힘임을 깨닫게 한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믿음의 그리스도인에 의해서 교회 공동체의 부족이 채워지고 주변의 사람들이 더불어 평화를 함께 누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인류이고 지구에 파송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러분이 걸어가기에 똑바르고 평평한 길을 열어 나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뒤따라가는 이들이 비록 약하고 절름거리는 사람들일지라도 넘어지거나 부상 당하지 않고 오히려 튼튼하게 될 것입니다.”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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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안에 넘치는 핑크를 주셨네, 봉숭아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