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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0



느헤미야 11장 십 분의 일과 십 분의 구


숨 이병창


에스라의 율법강독과 언약갱신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회복을 하게 되었다. 11장은 그들의 신앙회복이 어떤 열매로 맺어졌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 성벽공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심점을 만드는 사건이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 가운데 십 분의 일이 거주하는 도시로 완성하기 위해 인구 재배치 사업을 하였다.

1-2절은 인구 재배치 사업의 방법을 기록하고 3-9절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중 예루살렘에 거주한 가문과 인원을, 10-24절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성전 봉사자들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을, 25-36절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 가운데서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거주한 각 성읍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위에 언급된 사람들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레위인들도 있었고(10-19절) 에브라임 사람들과 므낫세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은 느디님 사람들도 있었다(21절). 다른 지파 사람들도 일부 거주했으나(대상 9:3절)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역사를 기록함에 있어 다윗 왕가와 남왕국 유다를 중심으로 기록한 역대기 기자와 관점을 같이하기 때문이다(대상 21장 참조). 예루살렘은 남왕국 유다의 수도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을 선택한 사람들


인구 재배치 사업은 7장의 인구 조사에서 보는 바처럼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루살렘으로의 이동은 안정된 삶의 자리를 떠나 어려움이 많은 곳으로 떠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예루살렘은 많은 적들이 노리는 곳이었다. 또한 이주자들은 지방에 있는 생활기반을 버리고 떠나왔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느 7:4). 하지만 그들은 황폐한 땅을 일구는 개척자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예루살렘 이주자는 제비 뽑혀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먼저 자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절).

신앙은 자발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올 때 자원하는 것이 믿음의 힘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도 자원한 일은 만족을 주지만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은 만족이 없다. 스스로 도전하여 성취하는 기쁨의 삶이 자신을 성장시키는 법이다.

대한민국 해병대가 전투력이 좋은 것은 육군과 달리 자원해서 모여든 지원병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제대하는 날짜를 헤아리며 손꼽아 기다리는 병사와 전쟁이 나면 가장 선봉에서 적진으로 뛰어들겠다고 마음먹고 훈련하는 병사는 똑같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력은 자발적인 선택인가? 아니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인가? 에 의해 결판이 난다.

미국으로 망명한 스탈린의 딸 스페트라나에게 한 기자가 질문했다. 미국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선택의 문제였어요. 이제 모든 것을 제가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게는 무척 부담스러웠어요’라고 대답했다. 당이 결정한 대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세상은 자유가 없다. 그 자유의 핵심은 선택의 자유이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조차 따먹을 수도 있고 안 따먹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그 뜻 안에는 인간에게 선택이라고 하는 주제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원하여 예루살렘 거주를 선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였다. 이 말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믿음의 길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칭찬이 뒤따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십 분의 일과 십 분의 구


인간에게 삶의 자리는 너무나 중요하다. 그가 어떤 삶의 터전을 가지고 사느냐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바탕이 된다. 예루살렘 거주를 선택한 사람들은 십 분의 구가 사는 곳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십 분의 구가 사는 것은 안정된 삶이 있고 편안한 일상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극과 도전과 성장이 없는 곳이다. 십 분의 일이 거주하는 예루살렘은 외부의 위협과 생활고와 긴장이 있지만 영혼의 평안함이 있는 곳이었다.

인간은 날마다 무엇을 보고 생각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성전이 있고 선생이 있고 배움이 있는 곳에서 자라나는 자식들의 미래는 밝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문화와 예술과 공동체의 훈김을 쪼이면서 살 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예루살렘이라 하더라도 강제로 사는 곳이라면 그것은 수용소에 불과할 것이다.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삶을 빛나게 살아갈 수 있다.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마 7:13-14).


사람들이 몰려드는 십 분의 구를 선택하지 말고, 타의에 의해 억지로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참고

11장 4절 – 아다야는 5대조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는 느헤미야의 기록이 역사적 진 정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11장 5절 - 마아세야는 실로 사람의 두목이고 유다의 막내아들인 셀라의 후손이다.

11장 6절 - 아다야와 마아세야는 용사들의 지도자였다.

야곱은 유다의 자손들을 사자로 비유하는 예언을 하였다(창 49:8-9).

11장 8절 – 베냐민 후손 928명. 유다 지파 베레스의 후손 468명보다 두 배이다(6절). 베냐민 후손들은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순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사기 19-21장에는 베냐민 지파의 성폭행 사건으로 인하여 거의 멸문의 화를 입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베냐민 지파는 600명의 용사만 겨우 살 아 남았고 나머지는 몰살당했다.




* 도깨비바늘 풀씨, 어디든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 씨를 옮겨 퍼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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