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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의 유적 보길도 세연정에서

2022.06.10 17:45

물님 조회 수:35


* 불재에 터 잡고 살아온 지  22년, 금년에는 바다가 그리웠는지 섬들을 떠돌았다. 통영 앞바다에 있는 수도에서 부터 진도의 우도 까지 두루 다니다가 보길도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원시림이 살아있는 터전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세상에 대해 금식하라는 뜻으로 새기면서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다.  신정일님이 보내주신 보길도와 윤선도에 관한 자료를 소개한다. 


 숨

길위의 인문학 우리땅 걷기 - 신정일

윤선도의 유적 보길도 세연정에서

윤선도의 유적 보길도 세연정에서

 

서양에서는 사람들이 정원을 거닐지만, 중국에서는 정원이 사람 속을 거닌다고 보았다. 그런 연유로 옛날에 어떤 사람은 “ 꽃을 보러 정원으로 나가지 말라. 그럴 필요는 없다. 그대 몸 안에 꽃들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우리 선현들 중 많은 사람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정원을 만들고자 하였다. 화담 서경덕의 화담, 율곡 이이가 조성한 석담 구곡 등인데, 나라 안에 조성된 대표적 정원이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윤선도가 조성한 세연정이다.

고산 윤선도가 완도의 보길도에 자리를 잡은 것은 병자호란 이후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세상이 환멸을 느껴서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를 발견하고 지은 정원으로 이곳에서 윤선도는 글을 쓰면서 풍류를 즐겼다.

 

부용동은 중국의 부용성이며

옛날 꿈꾸던바 그곳 전경 얻었네.

세인들은 신선이 산다는 선도 알지 못하고

다만 기화와 요초만을 찾고 있네.

 

<고산유고> 에 실린 시 한편인데, 그가 이 곳에 있을 때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이 남아 전한다.

 

“고산은 낙서재에서 아침이면 닭울음 소리에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한 후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네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악공들을 거느리고 석실이나 세연정에 나가 자연과 벗하며 놀았다.”

 

세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된 보길도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윤선도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윤선도는 1587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후사가 없었던 윤씨 종가에 입양된 윤선도는 특별한 스승 없이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웠다. 경사백가經史百家를 두루 읽었고 의약, 복서卜筮, 지리까지 광범위하게 공부한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30세가 되던 해에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반대파의 반격을 받아 함경도 경천으로 유배 길을 떠났으며, 1년 뒤에는 귀양지를 기장으로 옮겼다. 인조반정 이후 윤선도는 송시열과 함께 봉림대군, 인평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부터였다. 해남에 있던 윤선도는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왕손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에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갔는데, 그때는 이미 강화도마저 함락된 뒤였다. 할 수 없이 배를 돌려 귀향하는 길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의에 찬 그에게 서인들로부터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고생하고 있을 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는 비난까지 빗발치듯 들려왔다. 그는 세상을 다시 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풍랑이 거칠어 보길도에 오게 된 윤선도는 이 섬의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제주행을 포기하고 기암절벽과 동백나무가 어우러진 보길도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정착한 곳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하고, 정치 싸움에서 찌들고 멍든 마음을 이곳에서 풍류로써 달랬던 듯하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을 막아 연못(세연지)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섬을 조성해 큰 바위와 소나무들을 옮겨놓았으며, 그 둘레에 정자를 세우고 세연정洗然亭이라 이름 지었다.

 

보길도의 세연정은 섬 가운데에 원림으로 조성된 정자로 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윤선도의 5대 손인 윤위가 보길도를 방문한 뒤 쓴 《보길도지》에 윤선도가 보길도의 세연정에서 지냈던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일기가 청화(淸和)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였다. 학관(고산의 서자)의 어머니는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侍立)하고 기희(妓姬)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 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어부사시사〉 등의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 하고, 또는 옥소암(玉簫岩)에서 춤을 추게도 하였다. 이렇게 너울너울 춤추는 것은 음절에 맞았거니와, 그 몸놀림을 못 속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었다. 또한 칠암(七岩, 세연지에 잠긴 바위들)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고, 동·서도(양쪽 연못 안에 있는 섬)에서 연밥을 따기도 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무민당에 돌아왔다. 그 후에는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하였다. 이러한 일과는 고산이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으면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보길도 세연정이 여름 한낮에 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2022년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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