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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실상사를 찾아서 _ 겨울 산사, 그 포근하고 아름다운 풍경들

             겨울 산사, 그 포근하고 아름다운 풍경들 
             천년고찰 실상사를 찾아서
                                                                                                      글 이혜경 기전여중 교사

이렇게 2003년은 간다. 6번의 백제기행과 함께 계미년이 저물어간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지 이미 오래이건만 요즈음 나의 마음엔 여전히 ‘혹’함이 만만치 않다. 만남과 관계에 대해, 지난 세월에 대해, 삶의 의미에 대해 반추하곤 한다. 무엇을 바라고 사는 건가, 주변과 나눌 수 있는 사소한 그 무엇인가라도 지녀야 할 터인데.... 소용돌이치는 마음을 안고 훌훌 일상을 털고자 백제기행에 참여했다.
백제기행은 내게 이미 친정과 같은 편안함과 따스함을 안겨준다. 더구나 열정을 지닌 분들과의 만남이 있어 좋다. 그 무엇보다 하나라도 더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조법종교수님의 열강이 있어 더더욱 좋다. 백제기행과 함께 나의 앎의 깊이와 너비를 넓혀갈 수 있어 참 좋다.
휴우! 서둘렀건만 겨우겨우 출발시간에 맞추어 집결지에 도착했다. 역시 백제기행에 있어 날씨 걱정은 기우! 봄날을 연상케하는 투명하리만큼 유난히 곱고 맑은 햇살이 고맙다. 역시나 버스 안에서의 조법종선생님의 강의는 계속되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치려는 중국정부와 학계의 움직임에 대처하려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학술대회 참가로 바쁘실 터에 참으로 놀랍다.

첫 답사지는 고려조에 제작되었다는 마천마애여래입상! 길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 순간 아니! 저리 밝을 수가? 천년을 뛰어넘는 돌빛이 저리 밝다니 놀랍다. 위로 갈수록 전체적으로 서서히 돌출되어 ‘어! 왔니?’하고 반겨주는 듯 몸을 내밀고 있는 조각의 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이 느껴진다.
마애입상은 광배와 불신,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광배는 배모양의 거신광으로 두광과 신광이 두 줄의 양각선으로 조각되었다. 그 안에는 연주문이 새겨져 있고, 밖에는 화염문이 돌려져 있다. 불상의 전체 크기에 비해서 두상이 작지만 강건하면서도 원만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는 통견식 불의를 걸치고 있다.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인도풍의 좌견이나 우견과는 달리 통견은 왕즉불사상을 조명한다고 한다. 멋스럽게 뻗어 올라간 소나무를 대하니 2월에 갔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떠오른다.
마천마애여래입상의 밝은 이미지를 안고 환한 세상을 그리며 주 답사지인 실상사로 향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 흥척이 개창한 선종계통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실상선문 최초의 사찰이라고 한다. 이제껏 외국인에 의해서 그 전래가 이루어진 불교가 스스로가 새로운 사상원리를 찾아 입당하여 적극적으로 수용한 선의 세계가 펼쳐졌다고 하니 나름대로의 독자성이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해탈교를 건너기 전 입구에 세워진 석장승은 우리나라 사찰 입구에 세워진 장승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라고 한다. 두 눈과 코가 매우 크며 수염이 길게 달려 무서운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으로 보인다.
산속에 위치한 여느 절과 달리 평야지대에 있는 실상사의 본질은 실상사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비로소 알 수 있다. “우리 개개인이 부처가 되어 그 마음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조법종교수님의 말씀에 모두가 탄성을 발하며 둘러보았다. 그렇다. 실상사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핵심이었다. 저멀리 실상사를 둘러싼 산들이 바로 연꽃잎이라 했다. 바로 백화세상, 불교세상의 중심핵이 바로 실상사인 것이다.
해탈교를 건너 실상사 경내로 들어서는 관문 역할을 하는 천왕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 4구가 있다. 천년 세월을 뛰어넘은 단청이어서인지 차분하고 소박함이 도드라진다. 내소사가 안겨주던 정겨움과 편안함이 맥을 함께 하는 듯싶다. 보광전 앞에 2층 기단 위에 3층의 방형석탑 2기가 동서로 마주하고 서있다. 특히 2기 모두 노반, 복발, 연화, 보개, 용차와 보주에 이르기까지 상륜부가 거의 완전한 형태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자료사적 가치가 높다. 전반적인 감소비율 또한 날렵하고 시원스러운 느낌이다.
실상사 석등은 북 모양의 간석이 인상적이다. 앞에는 불을 켤 때 오르내리는 돌계단까지 남아 있어 석등이 지닌 단순한 장식적 의미를 넘어 실제 불을 켜는 의식용 의미를 말해준다.
오른쪽으로 돌면 약사전으로 이른다. 약사전은 몸과 마음의 질병을 낫게 함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서원을 세운 약사여래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철로 만든 약사불상과 불상 뒤에는 조선 후기에 그렸다는 약사불화가 있다. 약사불상이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한 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점인데 실상사의 약사여래는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다. 약사여래여서인지 건장한 신체가 돋보인다.

이어 주법당인 보광전으로 향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인데 조금은 왜소해 보인다. 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다. 실상사에는 일본과 관련된 설화가 많다고 한다.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이 있어 일본열도의 지도가 새겨진 범종을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두들겨 친다고 한다. 조법종교수님의 설명과 함께 자세히 들여다보니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모양으로 남아있고 나머지는 흐릿하여 괜한 말은 아닌 듯싶다. '에라, 한번 두들겨야지!' 한 나라의 흥망은 정신에 있을진대 싶어 마음을 담아 한번 두들겼다.
보광전을 왼편으로 돌아가니 실상사를 개창한 증각대사 홍척의 부도인 응료탑이 있다. 지대석은 사각형이고 하대석은 팔각형이다. 중대석 각면에 건달파와 아수라 등 팔부신이 조각되어있다. 상대석은 둥근 모양이다. 지난 기행에서 접했던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탑의 화려함과 세밀함에는 못 미치나 조각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이 상당하다. 사각에서 시작하여 원의 세계로 이르는 이 부도 하나에도 부처의 세계가 구현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가까이에 탑신은 사라지고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거북이를 조각한 귀부만 남아있는 증각대사 응료탑비가 있다. 오랜 풍상을 거친 돌빛이 마음에 차분하게 와 닿는다. 과연 나의 세월은 어떤 빛을 발할까? 앞으로 어찌 엮어 나가야 할까? 스스로에게 자문하며 발길을 돌렸다.
단아해 보이는 실상사의 해우소는 자연풍을 이용하여 전혀 냄새가 나지 않는 곳으로 이름이 높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제는 곳간으로 이용한다고 하나 ‘참으로 고마운 향기’라고 쓰인 알림글에서 환경운동에 앞장서시는 도법스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천년 전 혼란한 정치상황과 맞물린 왕실과의 지나친 유착의 고리를 끊고 불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고자 했던 구산선문 최초의 실상선문의 정신을 마음에 새기며 흙탕물 속에서 찬란한 꽃을 피우는 연꽃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현실참여에 앞장서는 오늘의 실상사 역시 천년 전의 초심을 잃지 않은 것이리라 싶다. 실상사를 떠나기 전 산봉우리를 꽃잎으로 한 연화세상의 핵심인 실상사의 단아한 자태를 마음에 담으며 다시금 둘러보았다.
정갈한 산채비빔밥을 달게 먹고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로 향하던 중 강가에 있던 무척이나 커다란 너럭바위를 지났다. 이름하여 바로 피바위라나? 적석강의 돌들처럼 붉은 빛을 띠고 있다. 고려말 이성계가 섬멸한 왜구들이 흘린 피의 흔적이란다. 황산대첩비는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여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으나 일본총독부가 파괴하여 크게 훼손되었다 한다. 역사란 한 민족의 삶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데 자랑스러운 역사만이 역사가 되기를 고집하는 것은 왜일까?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똑같은 부끄러움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진정 거듭나는 길이 아닐까 싶다. 역사의 왜곡 그 자체를 심히 부끄러워할 일이다.
황산대첩비 바로 가까이에 동편제 판소리의 시조 송흥록의 삶과 예술세계를 기리고자 보존한 송흥록생가, 소리마당이 있다. 전기 판소리 8명창 중 한 명으로 '판소리의 가왕'이라 일컬어진 송흥록의 삶과 예술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이어가야 할 것인가? 하얗고 둥근 조형물은 아마도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의 판소리 장단과 강약을 표현했을 터인데 정확한 의미를 잡지 못함이 아쉽다. 남원 운봉은 인간문화재 박초월의 고향이기도 하다니 역시 소리의 터전이라 하겠다. 이런 자리에서 단가 한자락이라도 멋스럽게 뽑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잘하면 잘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대로 흥겨움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터인데...

여원치마애석불로 이르는 울퉁불퉁한 샛길에는 눈이 쌓여있다.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눈길을 걷는 기분이 산뜻하다. 고려말에 제작되었다는 이 불상은 황산싸움의 승리를 예언했다는 꿈속의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이성계가 만들었다고 한다. 머리부분과 손이 다소 파손되었으나 비교적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오늘의 첫 답사지인 마천마애석불에 비해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덜하나 볼의 살이 통통하여 여성스러운 느낌이 전해진다.
이어 여전히 푸르른 소나무와 짙푸른 연못물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느낌을 짙게 연출하는 대곡리 암각화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이 꽤나 가파르다. 우와! 모두가 탄성을 발할만큼 널찍하고 시원한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법종교수님께서는 잠시 신들린 기를 지닌 제사장이 되어 몸짓으로 그 시대의 제사현장을 연출하셨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중국 집안의 국동대혈이 떠오름은 우연이 아니리라 싶다.
햇빛이 기운을 잃어가니 알싸한 차가움이 겨울임을 실감케 한다. 11세기 문종 때에 창건되어 불교가 최고로 번성하였던 고려시기의 절로 엄청난 규모와 사원전을 지녔었다는 만복사지가 다음 여정이다. 당간은 사라지고 지주만이 길가에 덩그라니 남아 우리를 반긴다. 주춧돌이 많이 있으면 내부공간을 활용하지 못하는 탑이 서 있었을 터이요, 주춧돌이 적으면 금당자리임을 각인할 수 있었다. 영화는 사라지고 이제는 수수한 느낌의 5층석탑, 5척의 청동불상을 모셨다던 석대좌, 아리따운 석불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석불은 얼굴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며 곡선미가 유연하여 여성적 아름다움이 물씬하다. 불신전체를 두르고 있는 화염문의 광배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 아쉬움이 짙다. 광배 뒷면에는 또 다른 불상인 약사여래입상이 음각되어 있다. “옆에서도 봤어요,”하는 한 ? 팀缺?말에 첫 여정지인 마천마애석불에서의 설명이 떠올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듯 아이들도 나름대로 앎의 경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포곡식석성인 교룡산성이 마지막 답사지다. 올해의 첫 답사지였던 부여성흥산성은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머리띠를 두른 듯 축성한 테뫼식 산성이었다. 메마른 겨울산을 좋은 이들과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설명과 함께 정담을 나눌 수 있음이 행복했다.
전에는 겨울산의 황량함이 고적함으로 와닿았는데 이제는 편안함으로 안겨온다. 새봄을, 새 생명을 준비하는 안식의 시간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져서일까. 군데군데 바람에 흐느적이는 억새조차 아름답고 정겹다.
완벽할 정도의 견고함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홍예는 좌우에서 돌을 쌓아 올라가다 맨 위 가운데에 마지막 돌을 끼워 넣음으로써 완성된다.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는 데다가 고풍스럽고 깔끔한 무지개 모양이 연출하는 빼어난 아름다움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교룡산성에는 그 홍예문이 ㄱ자로 각진 공간을 싸돌아가 있어 적의 공격이 있을 시 섬몰시키기에 최적인 듯싶다. 이 천혜의 요새지를 놓고 평지에서 왜구를 맞다가 참패를 면치 못했다는 명나라 장수가 야속하기만 하다.

드디어 교룡산성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온다. 곳곳에서 우리를 유혹했던 감나무들! 드디어 비탈길 만만해 보이는 곳에 서있다. 우와! 정말이지 빨갛게 익어 터질듯한 감홍시다. 조법종교수님의 배려로 이그러진 감홍시의 말랑거림과 달큰함을 맛볼 수 있었다.
흐뭇함을 마음 가득 담고 귀가길에 올랐다. 이번 기행에서 남원이 참으로 매력적인 곳임을, 역사?문화적 향취와 풍요가 넘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흥부전과 춘향전, 변강쇠전, 만복사 저포기 등의 고전문학의 산실이요 태였음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어 고맙다.
버스 안에서 다시금 관계에 대해 곰곰 생각했다. 남과 여,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동료와 친구, 나아가 북한과 남한,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일본, 미국 등등등. 관계에 있어 힘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음은 자명한 터요,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 변방 소수민족의 역사로 폄하하고 중국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이 때에 남북한 학자와 정계는 물론 온 국민이 하나되어 중국과의 역사적 관계와 함께 정치?경제적 관계를 재정립하는 좋은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 대처할 수 있을 터이니 무엇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 우리역사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 싶다.

백제기행의 참 의미를 되새기고자 시도된 2003년의 ‘다시 백제로’기행은 역사의 뒤안에 소외된 백제의 아픔과 슬픈 역사의 섭리를 넘어서는 진정함을 찾아 떠나는 길이라고 했다. 2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역이 신백제문화?해양왕국?동북아시아의 거점으로 거듭날 것을 기원하며 시작되었던 부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첫 백제기행이 일본과의 관계를 되새기게 하는 실상사기행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백제기행은 사랑과 나눔의 장이기도 하다. 매번 열강을 토하시는 조법종교수님께서는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시고자 고군분투하신다. 서로에게 전하고 권하는 따뜻한 차와 삶은 달걀, 비스킷과 사탕에는 따스한 인정과 사랑이 배어있다. 또한 아이들은 금세 친해져 벽을 허문다. 백제기행과 함께 자라는 그들이 다음 세대의 동량이 되리라 기대한다.
“내 소리 가져가라”는 송흥록의 현몽이 내게 “내 지혜와 사랑 가져가라”는 꿈으로 다가오는 그 날을 소망한다. 그 날을 꿈꾸기 위해 내가 받은 모든 사랑과 은혜를 어떻게든지 주변과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겠음을 다짐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제 서런 꿈 하나 흘려놓고 간 백제가 간직한 아픔과 회한을 희망과 기쁨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식을 되새기며 새로이 맞을 갑신년 기행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