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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김홍한

2012.07.24 23:18

물님 조회 수:1153

   생각

“생각”은 참 대단하다.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을 순간에 오간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종말까지를 순간에 오간다. 빛보다 빠른 것이 생각이다.

생각은 “얼”이다. 얼이 들어야 어른이다. 얼빠진 얼간이들에게 얼을 차리게 하는 것이 교육이요 종교다.

많은 이들이 바쁘다. 바쁘지 않으면 도태되는 줄 안다. 열심히 바쁘려 하고 바쁜 척이라도 한다. 어쩌다 여유가 있으면 금새 불안하다. 얼빠진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바쁘면 생각이 흩어진다. 생각을 깊이 할 수 없고 넓게 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진실한 생각은 어림없는 일이다.

洪範에 이르기를 “생각은 깊고 밝게 한다”고 했다.

朱子는 말하기를 “생각은 총명을 일으킨다”고 했다.

잠언서 기자는 말하기를 “사람의 생각은 깊은 물과 같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길어낸다.”고 했다. (잠언 20:5)

程子는 말하기를 “학문의 근원은 생각이다”고 했다.

데까르트는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데까르트는 생각을 인간존재의 근거로 삼았다. 인간존재의 근거를 神이 아닌 생각으로 삼았다는 면에서 그는 근세를 연 사람이다.

유영모는 말하기를 “念在神在(생각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존재증명이 이 한마디로 정리되는 듯하다.

함석헌은 말하기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함석헌은 “생각”을 역사철학으로 삼았다.

바울선생은 말하기를 “더러운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더럽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또 확신한다.” 고 했다. (롬14:14) 마치 화엄경의 “一切唯心造”를 보는 듯 하고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중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孔子는 말하기를 “배우되 생각지 아니하면 盲(어둠)하고 생각하되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하다”고 했다. (논어 위정 15장) “내가 종일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고 생각해 보았지만 무익했다. 학문하는것만 못하다”고 했다. (논어 위령공)

공자는 생각의 한계를 명확히 알았다. 생각만으로는 무익할뿐더러 위태하기까지 하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마 15:19)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막 12장)고 하셨다.

생각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생각이 아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룩한 생각이라야 생각이다.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다르고 경험이 달라서 그 생각이 극과 극으로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그 생각의 다름이 때로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유유상종이라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이들과 어울린다. 생각이 좁은 사람일수록 무리를 이루려고 한다. 홀로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은 달라도 함께할 수 있는데 성숙지 못한사람은 같아도 아주 작은 다름으로 함께 하지 못한다.

생각은 길고, 깊고, 넓게 해야 한다. 생각이 짧으면 실수를 하고, 깊지 않으면 천박해지며 넓지 않으면 편협해 진다. 성인의 생각은 길고, 깊고, 넓어서 이해하지 못함이 없고, 용납하지 못함이 없고, 사랑하지 못함이 없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가 바뀌는 것이다. 생각이 바뀌는 것이 거듭남이다

생각하는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다. 생각하지 않고 믿는다면 맹신이고 미신이다.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살아있는 백성이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살아있는 사람이다.

아름다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산다.

추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추한 삶을 산다.

크고 원대한 생각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고 깨끗하고 참된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크고 원대한 생각인데 깨끗하고 참되지 않은 생각이라면 그것은 악마적인 생각이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생각이다. 생각이 거룩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편협한 지식, 거짓된 지식, 쓸모없는 지식

오늘날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교회가 많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도대체 많고 적다는 판단 기준이 무엇인가. 지금보다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교회수가 적었던 때에도 교회가 많다고 한탄했다. 1955년 12월 26일 기독공보의 기사내용이다.

“예배당 사태가 났다. 한 동리 안에도 예배당이 열 개씩은 될 것이다. 장로교회도 고신파 ․ 한신파 ․ 복구파 ․ 재건파 교회가 있고, 장신파 에서도 서울 경기 노회 속 ․ 이북 노회 속 교회가 아무런 제약이 없이 자리잡고 세우면 그만이다. 게다가 성결교회, 감리교회까지 끼우면 한 동리에 열 개는 보통 될 수 있다. …… 신학 졸업생이 해마다 많이 나오니 이들이 다 한 교회씩 가져야 하며 서울로 교역자가 진출하니 교회당이 늘 수밖에 없다.”

교회가 많다고 한탄하는 것, 역시 교회가 적으니 더 세워야 한다고 하는 것은 편협된 지식에 근거한 편협된 생각이다.

1980년대,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원유가 고갈된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도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가운데 세계적인 정유회사들은 원유생산, 정유시설을 늘려가고 있다. 나의 어림계산으로는 현재 발견된 매장량으로도 2만년은 족히 사용하고도 남는 양이고 인류가 본격적으로 석유를 소비한 것은 불과 100여년 밖에 되지를 않는다. 현재 발견된 수 십 개의 초거대 유전 중에 하나의 유전에 매장된 것으로도 전 인류가 150년 이상 사용할 수가 있다. 현재 인류가 생산하는 원유는 하루 약 8,500만 베럴이고 초거대 유전 하나의 매장량은 5조 베럴 이상이다. 그런데 이런 초거대 유전이 현재 발견된 것만 해도 37개가 있고 그보다 작은 유전들은 무수히 많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참고)

얼마 전 모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호모 오일리쿠스’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방송했는데 정작 얼마만큼 원유가 매장되어있고 얼마나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이 생산량이 준다고 엄살했다.

소설 <까라마초프가의 형제들> 내용 중에 어떤 소녀가 석탄이 고갈 될 것을 염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세상을 속였다. 얼마 안 되어서 석탄은 석유로 대치되고 석탄 산업은 쇠퇴했다. 대부분의 석탄은 땅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석유도 석탄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석유가 고갈된다고 알고 있는 지식은 거짓 지식이다.

이야기 신학 54호에서 <莊子> 잡편 열어구편에 나오는 屠龍之技(도룡지기/ 용잡는 법)를 이야기 했다. 용잡는 법을 배우기는 했는데 용이라는 것이 가상의 동물이라 어찌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한 지식은 쓸모없는 지식이다.

편협한 지식, 거짓된 지식, 쓸모없는 지식에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깊고, 넓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