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258294
  • Today : 475
  • Yesterday : 353


사랑의 두 얼굴-날개

2009.05.10 07:33

물님 조회 수:2503

사랑의 두 얼굴 -날개

이 병 창(시인. 진달래교회 목사)

 

인간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두 팔 벌린 모습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그 모습은 사랑의 본질적 표현이 무엇인가를 잘 나타내준다. 그것은 품어주는 모습과 자유롭게 놓아 주는 사랑이다. 예수는 그 팔로 어린아이와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품어 주었고 세상을 향해 자유롭고 능력 있게 나갈 수 있도록 제자들을 안내했다. 이 양면성이 순수함과 지혜, 빛과 어둠을 아우르는 사랑의 두 얼굴이다.


두 팔을 벌린다는 것은 자신을 온전히 개방하기 위해서 주저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들어서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 세상을 이긴 방법은 무방비요, 무력함이었다. 온갖 비난과 욕을 감수하고 매를 맞고 못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고... 하는 예수의 모습은 사랑에 대한 인간의 모든 한계를 초월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사랑의 속성은 그 사랑이 클수록 비극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자비(慈悲)라는 한자어가 잘 보여 주고 있다. 지상에서 우리는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조건 없는 사랑에 들어설수록 내가 나에게 주는 고통과 상대가 나에게 주는 고통이 심각해 질 수 있다. 내 마음을 다 주었고 생각하고 무방비한 상태로 있을 때, 오히려 그 상대가 나를 공격적으로 대 한다면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예수의 사랑이 놀라운 것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신과 자신을 못 박고 증오하는 원수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바로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의 모든 미움과 폭력으로부터 승리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가 23:34)

이 세상은 자기 자신에게 무지하고 상대에게 무지한 맹목적인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두려움과 집착에 의한 강박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싸울 줄만 알 뿐 용서와 관용과 이해의 사랑을 알 까닭이 없다. 에니어그램이 다루고 있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못 박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해온 경우는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무지몽매한 악행에 대하여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그들마저 큰 사랑의 품으로 안으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일까.

 

원수들이 나를 위협하고 목숨을 빼앗는다 하더라도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은 나의 삶을 결정할 수는 없다. 나라고 하는 존재와 삶의 결정권을 그 어떤 폭력과 강요에도 포기하지 않는 힘과 권리를 우리는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폭력에 무릎 꿇지 않고, 미움을 선택하지 않고 사랑을 선택했다면 그 순간의 내 선택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그 선택은 죽음조차도 빼앗아 갈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어떤 폭력과 미움보다도 강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내용은 이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이 믿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 2:20)

예수의 다 이룬 사랑. 바울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우 어렵고 힘든 여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랑이란 자기 자신의 성숙과 믿음만큼 비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는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 17) 이 물음을 내가 받는다면 무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만큼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차마 민망해서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변함없는 사랑을 자신 있게 맹세할 수 없었다. 그는 예전의 큰소리치던 베드로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요한 21:17)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심정이 어땠을까.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의 모든 것이란 베드로의 배반, 변덕, 두려움, 이기심, 이해타산 등의 어둠을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속에는 베드로의 순박함, 용기, 결단, 순수한 사랑도 있다.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에는 이 양면성이 있다. 창조의 원리 역시 빛은 어둠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둠을 인정하지 않고 피하려 할 때 인간은 빛을 만날 길이 없다. 하나님은 보화를 나의 어둠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러므로 내가 피하고 싶고 비참해 하고 슬퍼하는 곳에 우리는 눈을 돌려 자세히 바라보아야 한다. 이 두 날개의 지혜를 얻어야 삶은 비상할 수 있다.


인간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지식의 라인만 있다면 고통이나 공포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지식을 존재화 할 때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의 세계를 뚫고 영원의 세계를 향해 나가고자 할 때 고통의 과정이 없을 수 없다. 몸 세포 속에 박혀 있는 집착과 강박을 정화하는 데 에니어그램 책이나 경전을 몇 권 읽었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라는 고통의 고치를 지나 부활의 나비로 날라 간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궁극적 앎을 얻고자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를 비롯한 영혼의 스승들은 자신의 어둠과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충고를 하고 있다. 자신의 어둠을 피하는 자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외면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비참하고 수치스럽기는 하지만 그 과거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완벽하게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베드로는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는 슬프고 민망하지만 자신의 서투른 사랑과 어둠을 예수의 넉넉한 팔 안에 내 놓았다. 베드로는 자신의 민망한 어둠 속에서 사랑의 빛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는 은혜로움으로 역사의 중심축에 세우셨다. (mo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