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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와 마음

2016.06.20 11:46

물님 조회 수:507

칼라와 마음

         이 병 창 (시인, 진달래교회)

 

사람들이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강조하면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시각의 지각력을 믿는 나머지 자신이 본 것이 마치 실재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인간이 눈으로 지각하는 것은 본래 사물의 모습이 아니라 바라본 사물이 의식 속에서 만들어내는 정신적 영상을 지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의 표상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 대해 바라보는 해석과 느낌은 각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 또한 사물에 대한 지각과 해석은 문화권에 따라서 또는 각자의 신념체계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칼라는 보편적인 감성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모든 에너지를 반사하는 흰색은 순수함과 빛을 상징하였다. 일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일체를 받아드리는 양극성의 특성이 있다. 흰색은 조그만 얼룩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순수이며 절대적 완전함이다. 고대로부터 영적인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은 흰 옷을 입어서 자신의 내적 순결을 드러내고자 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흰옷을 입었다. (레위기 16:32) 그러나 빛이 없는 검정색은 죽음과 슬픔을 상징했다.

 

죽음의 표시로써 검정 상복을 입는 것은 많은 문화권에서 관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맑은 하늘을 나타내는 파란색은 하늘의 계시 또는 평화를 상징했다. 울타리도 금도 없는 하늘은 선한 자나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려 준다. 예수는 그러한 하늘처럼 완전한(자연스러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다. 유다인들은 지성소의 휘장으로 하늘색을 사용했고 항상 야훼를 생각하라는 뜻으로 옷 끝에 파란 리본과 술을 달라는 율법을 준수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이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 (민수기 15:38)


빨간색은 피흘림과 그에 따른 죽음을 상징한다. 피는 생명의 핵심 조건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불충의 죄로 여겨졌다. 자주색은 위엄과 명예의 상징으로서의 왕권을 상징한다. 식물의 색인 초록은 회춘, 부활, 희망을 상징한다. 식물의 새순은 올리브 그린인데 성장의 과정을 거쳐 가면서 다양한 모습의 칼라를 나타낸다. 분명한 것은 각기 다른 칼라가 각자의 느낌과 심리적 생리적 반응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의 많은 실험들은 색의 파동이 인체의 신경공명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해 내고 있다. 인간의 감정적 반응은 알게 모르게 특정한 색깔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특정한 칼라를 좋아하고 그 칼라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 상태는 물론 살아온 삶의 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다채로운 마음의 표현을 칼라로 표현하는 기법은 미술치료의 영역에서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살아온 삶의 어떤 기간이나 구체적인 사건, 인간관계는 물론 음악의 리듬이나 그때그때의 기분을 칼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인간의 두뇌는 실제 사물이나 그 사물의 영상에 나타난 칼라에 대해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피피티 영상을 사용하여 마음에 미치는 칼라 효과를 연구하기도 한다. 칼라에 따른 심리적 효과 때문에 마음의 에너지를 다루는 심리기법으로 칼라테라피를 사용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과 무의식의 영역을 파악하고 심리적 치료를 하는 데 있어 칼라는 매우 유용하다. 입고 있는 옷이나 집안의 칼라를 정신건강에 좋은 방향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적인 일이 되고 있다. 따라서 색채가 상징하는 의미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이 요구하는 유용한 칼라를 파악하는 것은 행복한 삶의 기본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디자인 감각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 되고 있다. 디자인 감각의 핵심은 색감이다. 칼라의 순수한 욕구를 마음껏 표현해야할 어린아이들에게 하늘은 파랑색, 나무는 초록색이라고 주입하는 교육적 풍토에서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입시에 의하여 미술시간이 사라진 오늘의 학교풍토는 나라의 미래를 생각할 때 암담하기 짝이 없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거나 죽어가고 있는가.

 

어린 아이들은 형태위주가 아니라 칼라위주의 그림을 그린다. 어떤 대상을 그리던 고정된 칼라로 그리지 않는다. 그것은 좌뇌적 그림이 아니라 우뇌적 사고를 반영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이것은 이렇게 저것은 저렇게 칼라를 사용해야 한다고 교사의 고정관념을 주입하기 시작하면 꿈과 환상이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무의식적인 욕구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필자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를 자주 묻곤 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당황스러워 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삶을 재미없고 애매모호하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깊은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악마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한다. 눈의 어둠이란 삶의 목표가 없이 그럭저럭 애매모호하게 떠도는 인생이다. 삶을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마음처럼 옷의 칼라도 어둡기 마련이다. 그들은 고정된 칼라의 옷만 입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흑백의 옷만 입는 사람은 이분법적 사고에 노출된다. 적과 아군만 존재하는 경직된 사고로 살아가기 쉽다.

 

하나님은 무궁무진한 칼라의 세상을 창조하시고 변화의 다양함을 즐기도록 허락하셨다. 자연 만물은 저마다 자신의 칼라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도 들에 핀 꽃과 같이 온전하게 자신의 빛깔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크레파스를 바라보며

 

초등학교 사학년 때였을 거야

그 때는 무척 가난하게들 사는 때였지

색깔 있는 양초나 다를 바 없는 크레용을

그나마 아껴 가면서 그림을 그렸지

어느 날 밤이라는 제목으로

장독 항아리들을 옆으로 누인

그림을 그렸는데

그 날 나는 공개적으로

밤이 되면 장독이 누워 잔다고 믿는

바보가 되고 말았지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

무참하게 짓밟힌 그 날 이후

나는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이

성장한 거 같아

미술에 대한 열망을 남의 그림을 보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면서.

요즘 아이들이 색깔 좋고 다양한 크레파스를

함부로 다루는 걸 보면 왜 그렇게

마음이 안 좋은지 몰라

버려져 나뒹구는 크레파스 조각마다

돈은 꼭 갚겠다. 안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절규한 고흐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산은 녹색

하늘은 파란색

나무는 나무색으로 그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런 선생님이 요즘도 계신 건 아니겠지.

- 시집 메리붓다마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