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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의 시작과 끝 - 클리어 (clear)

2016.06.20 11:48

물님 조회 수:511




빛깔의 시작과 끝 - 클리어 (clear)

이 병 창 ( 시인, 진달래교회 목사)

 

과학자들은 인간의 눈이 2퍼센트 정도의 정보를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도 98 퍼센트의 정보가 걸러진 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림 하나를 보는 데도 그 사람의 안목과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과 해석을 하곤 하지 않는가. 그것은 바라볼 때 이미 자신 안에 입력된 관념과 생각의 필터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사물을 바라보는 수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라보는 관점에서 되어보는 관점을 체험하게 될 때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된다. 그 때 모든 만물이 입고 있는 빛깔의 옷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영혼의 개안(開眼)이다.

영혼의 스승들은 제자들이 보고 듣고 안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 진리, 영성........ 이런 주제들은 모두 인간의 시각과 지식을 넘어서 있다. 사과에 대한 설명들이 사과 맛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신에 대한 말들 역시 종교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신을 이해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광원의 오북환 장로는 나에게 ?’가 없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것은 어떤 탐구나 질문, 에고의 저항이 모두 사라질 때 신을 만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지식은 라는 존재 밖에 대해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라는 존재의 내면으로 들어설 때 만나게 된다. 종교가 날이 갈수록 천박해지는 것은 인간 존재의 바닥을 조명하는 지혜의 빛이 어두워지는 데 있다. 이제는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예수, 하나님을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나의 비좁은 의식 안에 가두어진 하나님을 해방하여야 나도 해방이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로부터 구원 받아야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영성의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무들을 향하여 자매들이여, 잘 있었니? 오늘 조금 아파 보이는군이라 말했고 임종 시에 그의 당나귀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남겼다. “ 당나귀 형제여, 그대는 나에게 아주 훌륭한 하인이었다. 무슨 말로 그대에게 고마워할 수 있을까? ” 그에게 당나귀는 동물이 아니라 형제였다. 그것은 당나귀라는 이름으로 치부해버리면서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편견을 넘어서서 당나귀라는 이름의 존재를 존재로 대하는 영성의 진수이다.

영성이란 바라보는 대상을 이름으로 파악하는 의식의 시스템을 벗어나는 데서 출발한다. 그 때 사물은 존재로 격상된다. 존재를 존재로 받아들이는 시각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련이 영성수련이다. 사막의 교부로서 기독교 역사 속에 개인 수도의 전형을 세운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는 바로 이 점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순수해질수록 그의 영혼은 정화되고 성화되어진다. 하늘이 선한 자나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내려 주는 것처럼 그렇게 가장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을 칼라로 비유한다면 클리어 또는 화이트이다.

 

모든 칼라를 담고 있는 투명함

 

지리산 계곡에서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가는 시냇물, 겨울산천을 덮어주며 소리 없이 내리는 눈, 깨끗한 수정과 금강석, 백지 수표, 걸레로 방바닥을 닦는 행위, 내면의 깊은 곳을 성찰하게 하는 보름 달, 거짓말 집단에서 진실한 사람, 무소유 .... 이런 것들이 클리어의 속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 준다.

인간의 영적 성장은 순수함을 추구하기 시작 할 때부터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들을 배척하는 단계가 나타난다. 금욕주의자나 완벽주의자들은 이 문제가 인생의 중요한 수업료를 내는 주제가 되기도 한다. 순수함을 지향하는 마음은 가상한 것이기는 하나 순수함에만 집착하면 방바닥의 장판이 구멍 날 때 까지 닦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 또한 순수함만 추구하면 냉정해질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을 귀 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너무 순수함만 주장하게 되면 상대가 들어설 공간을 허락하기 어렵다. 의식이 성장할수록 깨끗하지 않은 것에서 깨끗한 것을 발견하고 그렇지 못한 상대에게서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더러운 흙탕물에서 달을 보는 사람처럼 더러움 속에서 순수를 발견하고 고통 속에서 삶에 대한 이해와 지혜를 터득한다. 지구 공간이 흥미로운 것은 즉비(卽非)의 과정을 거쳐 지혜의 학습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굶주림을 통해서 진정한 밥맛을 알게 되고 돈이 없이 땅바닥에 내동이쳐 질 때 돈의 귀중함을 깨닫곤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수행은 그 완성이 사랑(핑크)이지 클리어가 아니다. 그 순수는 수정보다는 금강석 같은 그리스도 의식이다.

수정이 영혼의 성장과정을 상징한다면 금강석은 인간의식의 정점이다. 수정은 만지는 사람의 에너지에 영향을 받지만 금강석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보통 순수한 사람들이 현실적인 힘이 부족하고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약한 측면이 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지 못하고 저항해야 할 때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이른바 착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연단을 받고 힘을 받게 되면 순수하고 고결하면서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마치 수정으로는 다른 광물을 절단할 수 없지만 금강석은 쇠조차도 자르는 이치와 같다.

금강석

나의 전생은 숯이었습니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였습니다.

숯 이전에는

나무 이전에는 햇빛이었습니다

나는 내 가슴 속에 빛을

담고 있는 햇빛입니다.

- 나의 하느님이 물에 젖고 있다 -

 

클리어의 상징으로 거울이 있다.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은 안과 밖이 하나임을 통찰하게 한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은 거울 밖의 내가 문제라는 것을 알려 준다 . 그러나 거울 밖의 내가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미 믿음의 세계에 있다. 그것은 현상의 세계에 나타나게 되어있다. 나에게 싫음의 에너지가 있어서 싫은 것이 나타난다는 것, 다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할 때 인정할 수 있다.

클리어는 빛을 모두 반사한다. 모든 빛을 거부하기 때문에 모든 색을 받아들이는 역설의 칼라이다. 없음으로 존재하고 버림으로 진정 얻게 되는 삶의 비밀이 담긴 칼라이다.

몸의 등불은 눈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병들었으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라. ” (루가복음 11:34)

 

클리어한 지혜의 눈이 밝아질 때 우리는 몸을 입고 있는 이 세계에서 괴로움을 은혜의 빛으로 이해 할 수 있고 그 괴로움의 끈을 놓아버릴 수 있다. 그리고 빛을 향해 용기 있게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클리어는 바라지 않는 것을 갖게 되거나 결코 소유 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는 헛된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나는 다 이루었다.

 

이승의 언덕에서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가라는 금강경의 한 구절이 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말을 나는 빨주노초파남보를 건너고 건너서 모든 색이 통합되어 완성되는 클리어로 건너가세 라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클리어는 처음이고 끝이다. 모든 것의 통합이고 조화이다. 그것은 완벽한 비움이고 공이고 초월이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위에서 하신 한 말씀을 생각한다. “ 다 이루었다이 말씀은 나는 다 비웠다는 의미이리라.

예수는 작고 초라하게 보이는 자연과 통했고(마젠타)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했고(핑크) 삶을 뜨겁게 불살랐다. (레드) 그리고 마침내 공을 이루고 죽음이라는 꿈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꿈 판을 깨뜨렸다. 살아서 죽는 법, 죽어서 사는 법, 그리하여 한 세상 울울하지 않고 탕탕하게 사는 비법을 가르치시고 보여 주셨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순명과 헌신을 인생을 향한 무차별의 사랑으로 증명했다. 예수는 집도 없이 살았고 사회복지 사업을 한 것도 아니지만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겼다. 이승의 모든 칼라를 여한 없이 살아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더 이상 어떤 요구나 필요도 없는 경지의 그 말씀은 클리어의 위대한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