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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Green) - 몸과 마음의 양식

2016.06.20 12:00

물님 조회 수:581

그린 (Green) - 몸과 마음의 양식

 

 

 

한번만은 아니야

숨을 쉬고 있는 한

또 다른 한번이 있을 수 있어.

봄날이 오면

새순이 올라오듯

너에게도 다른 얼굴의 새순들이

올라오고 있어,

나는 너의 가슴 속에서 물결치는

숲을 보고 있지.

태양의 불길이 너의 새순 속에

내려와 있는 것을.

눈만 뜨면 되는 거야

네 안의 공간만 열어젖히면 되는 거야.

 

그렇다고-.

 

- 그린 -

 

봄날에 새순이 올라오는 걸 관찰해 보면 처음부터 연한 페일그린으로 올라오는 새순도 있지만 꽃이 피지 않는 참나무과들은 올리브 그린의 빛깔임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참나무에게 있어서 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긴 겨울을 견디고 터져 나오는 올리브빛 새순이라고 생각한다. 올리브는 열매가 매우 써서 곧바로 먹을 수 없는 열매이다. 압착을 해서 기름을 짜든지 소금에 절여 쓴맛을 제거해서 먹게 된다.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올리브나무의 빛깔은 개척과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인간의 상징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의 어둠에서 희망의 불빛은 더욱 강력해지기 마련이다. 추운 겨울에도 자신의 빛깔을 잃어버리지 않는 상록수는 절개와 지조 있는 인간의 상징으로 여겨 왔다.

인간은 뜻이 크고 깊을수록 언제나 시련을 통과하기 마련이다. (레드)으로만 내려서지 않고 하늘(블루)을 동시에 지향하는 자에게는 연단의 과정이 있다. 그것은 자유혼을 얻기 위하여, 인간과 세상을 더 크게 담기 위하여 삶의 쓰라림을 내면의 공간 확장 에너지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틀에서 주어진 길로만 가는 사람에게는 박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거부하고 나설 때 투쟁과 고난이 찾아오게 된다. 인간은 시련을 통과하면서 내면에는 상록수의 절개와 외적으로는 대나무와 같은 유연성과 포용력이 길러지게 된다. 녹색은 포용의 칼라이다.

노랑에서 초록으로 가는 중간 과정에 올리브 그린이 있다. 녹색이 가슴이라면 올리브 그린은 위장의 명치와 가슴의 중간 부위에 해당한다. 사랑의 하트로 건너가는 다리와 같은 위치이다. 인간의 성숙은 눈물과 함께 밥을 먹어보는 올리브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과정에서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나비가 되어 나올 때, 무진 애를 쓰는 과정에서 날을 수 있는 힘을 얻듯이 자립의 힘이 길러지게 된다. 자립의 힘이 있을 때 공생과 공존의 길로 갈 수 있다. 녹색은 공존과 공생의 칼라이다. 특히 녹색 중에서도 올리브 그린은 여성적 리더쉽의 칼라이다. 그것은 수용과 포용력으로 이끄는 리더쉽이기 때문이다. 칼라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다룰 때 녹색의 종류만 해도 12가지인 데, 우리 조상들은 녹색으로 분류되는 다양성을 대충 초록이 동색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 같다.

 

 

녹색 - 인간의식의 산소

 

무지개 7빛깔 중에서 가운데 위치에 녹색이 있다. 모든 칼라의 중심인 녹색은 몸으로 보면 가슴에 해당한다.(4차크라) 가슴에는 심장과 폐가 있다. 가슴은 산소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공간이다. 숲은 산소를 배출하여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공간이다. 생명의 힘이 빨강이라면 생명 그 자체의 칼라가 녹색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힘이 들 때 사람들은 산에 오른다. 그것은 숲의 칼라인 녹색과의 만남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답이 두 개라는 말이다. 무엇이 답인지 모를 때 인간은 답답해진다. 답답해지면 가슴의 공간이 비좁아지게 된다. 그 때 녹색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녹색은 산소와 같다. 도시 공간에서 살다보면 인간의 마음 공간은 비좁아지고 감성은 메말라 간다. 이 때 녹색의 에너지로 충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녹색은 자신의 경계선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칼라이다. 따라서 녹색은 인간의 가슴에 공간을 선물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답답할 때 숲을 찾아가는 것은 녹색이 주는 공간 에너지 때문이다. 녹색의 숲은 가슴을 열어주고 편안함과 회복의 기운을 준다.

20여년 가까이 숲에서 살아 왔지만 날이 갈수록 숲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실감한다. 문간에 와있는 두꺼비, 땅을 파고 가는 두더지, 어쩌다 와서 물만 마시고 가는 고슴도치와 온갖 나무와 풀들을 바라보면 숲이야 말로 생명으로 가득 찬 공간임을 느끼게 된다. 숲은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공간이다. 서로를 희생시키는 약육강식의 공간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조화로운 공간이다. 환경운동가들의 고전인 침묵의 봄을 썼던 레이첼 카슨(1907-1964)은 그의 유고집 잃어버린 숲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사람은 스스로 창조해낸 인공적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지와 물이 있을 때 비로소 씨가 자라난다는 현실로부터 자기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해왔던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에 교만을 떨며 자기 자신이나 주변 세상을 파괴로 이끄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은 없으나 ... 우리를 둘러싼 삼라만상에 대하여) 놀라고 감동하는 마음과 겸손은 유익하며 파괴를 추구하는 욕망과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최근 산림휴양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것도 녹색 칼라의 수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과 행복한 삶의 대안으로 숲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숲을 찾는 사람들의 80%는 건강 또는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기 위해서라고 한다. 인류는 오랜 세월 자연과 함께 살아왔다. 콘크리트 문명 속에서 자연과 단절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짧은 세월 동안 온갖 병마와 인간성의 파괴에 시달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경제 논리로 삶을 재단하는 오늘의 현실은 엄청난 부작용을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감성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렀다. 무한경쟁만 부추기는 사회는 인간의 사회일 수 없다. 그것은 약육강식의 지옥일 뿐이다. 숲은 인간의 감성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숲을 찾기 시작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숲의 나무와 풀, 흐르는 물과 새 소리, 시간에 따라 변화되는 빛깔들은 인간의 감성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오감의 회복은 인간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감각의 회복은 감성의 회복과 이어지고 감성의 회복은 영성의 회복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숲의 유익은 고요함으로 인간을 안내한다는 데 있다. 숲은 침묵으로 말하는 공간이다. 숲이 휴식과 치유를 주는 것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깊이 이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병폐는 자신의 고요함과 침묵을 누리는 것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는 데 있다. 티브이나 휴대폰 그리고 도시의 소음 속에서 오감이 마비되다 보니 침묵 자체를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침묵이나 명상은 인간의 감정과 영적 성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의 삶이 얼마나 산과 함께하는 삶이었는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영성은 산의 영성이고 초록의 영성이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떠나 산에서 기도하시고 고요한 시간을 갖고자 힘써 노력했던 예수의 삶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침묵의 시간은 우주적 생명의 힘과 연결하고 조화할 수 있도록 한다. 호흡이 깊어지면서 내면을 성찰하고 생각을 깊게 하고 자신의 현 위치와 진로를 사색하게 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식을 창조적으로 이끌어 준다. 침묵은 집중이다. 집중력과 정서 안정은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삶을 누리기 위한 기본적 조건이다.

녹색을 가까이 하고 녹색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편안하고 균형 감각이 있다. 누가 와서 기대어도 맞이할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 가슴은 목부터 시작해서 파랑인 목과 미간의 남색과 백회의 보라로 이어지는 영적인 부분과 노란 빛의 위장과 단전의 주황, 회음부 레드가 만나는 연결 부분이다. 또한 가슴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 지점이다.

 

사랑은 공간이다

 

지구 공간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을 만나는 것이다. 공간은 존재의 자궁이다. 어떤 생명체든지 자신의 생명력을 발휘하려면 적절한 공간이 있어야만 한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 잎과 잎 사이의 공간이 확보 될 때 나무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만약 칡넝쿨이 감고 올라가면서 나무를 뒤덮어 버린다면 성장은 멈추고 죽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의식이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의 눈먼 집착은 상대에게 공간을 허락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자녀를 자립의지가 박약한 마마보이로 만드는 부모들은 맹렬한 집착을 사랑이라고 강변한다.

자녀에게 부모가 줄 수 있는 큰 사랑은 자녀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여 선택하게 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립의 힘을 길러주는 데 있다. 출가한 자녀들에게까지 과다한 간섭을 하면서 부모에게 의존하도록 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것은 분리불안이다. 분리불안은 동일시나 질투의 감정으로 돌변하기 쉽다. 그렇게 되면 공간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는 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공간침해의 문제가 발생하기 쉽다. 부모는 모닥불(레드) 역할이 아니라 모닥불이 잘 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소(그린) 역할이면 충분하다. 집착으로부터 깨어난 사랑은 타인의 공간을 인정하는 데서 완성된다. 이런 바탕이 있을 때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건강하고 성숙한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상대에게 공간을 주고 그 공간을 인정하는 사랑이 참 사랑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사랑으로 포장된 집착일 뿐이다.

나무에 기대어 있을 때 쉼(, )이 있다. 녹색은 인간에게 쉼과 여유를 주는 칼라이다. 여유가 있어야 기다릴 수 있다. 기다림의 힘이 있을 때 사랑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상대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조급해지고 화를 내기 마련이다. 인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중심이 서게 되면 자신의 현 위치를 돌아보고, 어느 길로 갈 것인지를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즉 방향성의 주제가 대두되게 된다. 공간과 진로의 칼라가 녹색이기 때문에 도로 표지판의 간판이 녹색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물어 보자.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녹색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양식이다. 녹색은 생명 그 자체이다. 지구에서 녹색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 생명의 파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우리가 환경 문제를 첨예하게 다루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녹색은 태양 에너지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 에너지를 섭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녹색은 지구의 원형적 생명 자원이자 번영과 성장의 에너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