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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재 상사화의 노래

2008.08.20 21:41

구인회 조회 수:2439





<불재의 상사화>




상 사 화 의   노 래





빛이 너울너울 춤추고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고갯마루 불재  


구부정한 다섯 그루 곰솔나무, 못생긴 보리수 하나  


무덤덤이 노는 무덤가로 이사 온 지 어언 3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쉴 자리가 있다는 데


오호라. 머리 둘 곳도 없어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처량한 내 신세


오갈 데 없이 여기 저기 다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내 생각과 느낌도 모른 채 함부로 나를 옮겨 놓은 사람이 미웠고  


내 생각과 느낌 그대로 살지 못하는 나에 대하여 온통 화가 났습니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내가 설자리 뻗을 자리가 아니었어요.


그래도 큰 절이나 품격 있는 대갓집에서 귀하게 자란 몸인데


격에 안 어울리게 이름 모를 무덤가는 무엇이며,


좁디좁은 내 자리 찌를 듯이 째려보며 집적대는 띠풀 아저씨  


쬐끄만 것이 기분도 모르고 지가 언제 봤다고 손 내미는 봄맞이꽃,


어라, 내가 젤로 이쁜 줄 알았는데 무덤이고 꽃밭이고 자줏빛 자태를 뽐내는 할미꽃은


내가 봐도 넘 이뻐서 시기심에 힘이 쭈욱 빠지고 내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그나마 혈관 깊숙이 스며드는 산소와 세포 하나까지 파고드는 빛의 손짓에 위안을 받았지요.


백두대간 등줄기를 타고 깨어난 산소는 기죽은 나를 흔들어 깨웠고,


신령한 빛은“어서 빨리 기운 내라”고 원기를 북돋아 주었답니다.


그렇지만 존재의 바다에 무겁게 떨어져 끝없는 심연 속에 빠져버린 나


영혼의 어둠은 생명의 빛을 가려버렸고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 하느님으로부터 자기를 감춰버린 최초의 아담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첫 해부터 꽃 피우기를 그만둬버렸어요.


지독하게 완악해진 난 그분을 향한 문을 굳게 닫아버리고


웅크리고 앉은 다우너소처럼 도무지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 거예요.


“누가 나 같은 것 쳐다보기나 한데”


“뭣 하러 힘들여가며 일하고, 누구 좋은 일 시키려고 꽃 피워”


“내비둬,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그냥 살다 그냥 죽을겨”


바람불면 바람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서럽게 눈비 맞으면서 서서히 나를 죽여 가던 나


몸 하나 가리고 숨기기 위해서 사방팔방 문을 굳게 잠그고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나


그러면서도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난 그렇게 절망에 몸부림쳤고,


어둠 속에서 한숨 내뿜는 사이 끝내 그분마저 떠나셨습니다.


아니, 그래도 문밖에서 빛을 내려주시던 그분을 내가 추방해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늘 그렇게 한 바퀴 두 바퀴 우주의 수레바퀴는 돌아가고


멈칫멈칫 세 바퀴가 돌던 어느 봄날


늘 그렇지 않게 나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 하나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간신히 퍼 올린 내 이파리를 쓰다듬어 주시더니


이내 나를 감싸고 뿌리 깊은 곳까지 퍼서 양지바른 곳에 옮겨줬습니다.


이 곳은 쉴 자리가 있고 빛과 흙을 더 차지하려고


밀치고 싸우지 않아도 될 넉넉한 땅입니다.


더러는 새팥 강아지풀이 간지럼을 피우고 성가시게 굴기도 하지만


목을 길게 늘여 빼고 판소리 한마당 샛노랗게 뽑아대는 참나리 하늘말나리


하늘빛 새벽 눈 닮은 도라지의 멋들어진 춤사위


“얼씨구, 조오타”연신 흥 돋우는 나무수국의 목청은 어찌 그리 시원한지


이들의 흥겨운 무대에 뜨거운 박수까지 보냈어요.


이제 오가는 진달래 가족들의 웃음꽃에 슬그머니 웃기도 하고


“저 장미꽃 위에 이슬”성가소리에 같이 마음 모아리고,


다른 초목들과 함께 물님의 신령한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게 됐습니다.


아이들, 지선 지화 지문 은호 선호 현호 성록 하영 해원 해인 성류 도훈 서영 수인 태현이


여기 저기 신명나게 뛰어 노는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을 보면 내 심장이 뛰고


해맑은 웃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생기가 넘쳐 오릅니다.


어느새 이분들이 좋아졌나 봅니다.


이분들을 무척이나 사랑하나 봅니다.


주일날만 되면 오가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못 온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못내 그리워합니다.


눈감으면 별빛 따라 그대가, 아 사랑스런 그대가 보입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늘 거룩한 이웃과 함께 있었던 겁니다.


팔월 둘째 주 멀찍이서 나를 응시하는 또 다른 눈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불재를 밝혀주기를 바라면서 나를 첨 옮기고


행여나 아프지나 않을까 시들지는 않을까 온통 염려로 보살펴준 그 눈빛


그날따라 그 눈빛은 애처로움 그야말로 애처로움 이었어요.


그는“왜 너는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늘 처량하게 있느냐”


“때가 찼어, 이번에는 꽃을 피워야지”햇빛 움켜쥐고 애타는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어쩌면 그의 기다림은 나의 기다림


그의 그리움은 나의 그리움이었던 겁니다.


이 그리움이 우주만큼 커질 때 나는 죽고 변화의 해일이 일게 될 겁니다.


아, 내가 죽어야 그대가 사는 잔혹한 운명, 생사가 한 몸인 나는 상사화


모든 것을 이루고 나면 부활하게 되는 분홍빛 그 꽃입니다.


불재의 등불이 되기를 염원하는 눈빛


우주의 촛불이 되기를 바라는 눈빛을 그리며,


난 혼자가 아니라 참만고일성순 參萬古一成荀


태고적부터 온 우주가 나를 살리기 위하여 한 몸으로 참여해 온 큰 섭리에 눈뜨고


이 세상의 그리움은 나의 그리움


죽어야 사는 내 운명을 끌어안고


그대를 위하여 길고 뜨거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가려주고 숨겨주던 이 살을 태워


불재와 이 세상과 온 우주에 분홍빛 영혼의 꽃을 피우겠습니다.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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