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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마을['10.5.9]

2010.05.14 16:44

구인회 조회 수:1985

33메리붓다마스3.jpg 


                                  그리스도의  
 

   불재 온 산천이 연록과 초록의 싱그러운 물결

   밤사이 하늘에 매달린 은방울꽃 희망의 종소리를 터뜨리고

   물오른 오동나무의 연보라 빛깔도 산 아래로 번져 갑니다.

   부처님 오신날, 거리엔 연잎 등불도 하나씩 열매 맺습니다.

   출가와 고행을 통해서 성불하셔서 그런지

   부처님 하면 떠오르는 상징이 연꽃과 등불

   연꽃은 진흙 속에서 자라지만 그 진흙에 때 묻지 않고 홀로 향기를 냅니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자등명 自燈明 법귀의 法歸依 -열반경

   네 등불 네가 밝히고 가고 오로지 진리에 귀의해서 살라.”

   부처를 믿으라고 하신 게 아니라 진리만을 믿고 자신 만을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진리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연꽃과 연등이 불교의 상징이라 하여 지극히 배타적입니다.

   내가 믿는 종교에 따라서 그분이 오신 날이 저주의 날이 되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아니거나 찬미의 날이 되는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내 부모와 내가 믿는 종교가 다르거나 안 믿는다고

   생신날 부모님 밥상을 안 차려 드리는가요?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 오신날도 마찬가지 내가 믿는 종교를 떠나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고 가르침을 상고해보는 일도 의미 있는 일.

 

   사실상 두 분 다 종교의 교주로 오신 게 아니며

   인류의 구원과 해탈을 위한 깨달음의 길을 열어 주신 분들이 아닌지요?

   우리 같은 기독교인도 불교에 대하여 조금만 알아보고자 한다면

   성서의 말씀과 불경의 말씀의 유사점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계명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고

   금강경은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을 통해서 나를 찾는다면

   이는 잘못된 길이다. 절대로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불상의 숭배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으며 붓다는 신을 말하지 않고

   명상을 통한 깨달음의 길을 중시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심지어 불교 중흥기의 아쇼카왕 때에는 니간타라는 제자가

   부처의 형상을 그렸다는 죄로 처형당한 바 있습니다.

   복음서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면

   원각경은 “원수를 보거든 네 부모와 같이 섬기라” 고 합니다.

   특히 복음서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법화경의 ‘궁자의 비유’와

   그 내용이 흡사하여 성서인지 불경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지요.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이 재산을 한 목 챙겨 나갔는데

   패가망신해서 돼지같이 살다가 염치없이 아버지한테 돌아오게 되고

   아버지가 그 돌아온 아들을 환대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법화경의 궁자의 비유는 재산을 한 목 챙겨 나간 아들이

   패가망신하여 거지같이 살다가 도저히 못 견디고

   어버지집에 종으로라도 들어가려고 서성이다가 붙잡혀 죽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복된 소식입니다.

   빛으로 오신 성인의 말씀이 곧 길이요 진리여서 그런지

   두 성인이 보여주신 빛이 같은 빛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그러나 진정 그 빛이 내게 들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

   대사일번절후재소 大死一番絶後再蘇

   한번 크게 죽어야 살아나지 죽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석불이 십자가에 달리고 석굴암에 예수님의 보좌가 안치되는 세상

   목사님이 교회에서 팔정도를 전하시고 스님이 절에서 팔복을 설하며

   자비와 사랑이 서로 소통하고

   진리와 말씀이 자유롭게 대통하는 눈뜬 대방광 이실법계를 그려봅니다.

   불은 꺼지고 빛이 되어가는 물님의 초록빛 사랑과 평화의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모든 인간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아버지인 존재다. 신성한 존재다.

   카자흐스탄 이민교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상해 이우라는 도시에 다녀왔다

   와이비라는 회사에서 지원을 받은 바 있는데 대신 빚을 값아 달라고

   이민교 선교사님한테 징발 당해서 다녀왔다.

   예상과는 달리 이우는 고층아파트가 계속 지어졌고 도무지 끝이 없었다.

   이 도시를 보고 내 머리 속에 중국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었다.

   우리는 지난 세월 불행하게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런데 중국은 고작 9년 만에 강이 흐르는 모래 황무지를

   공항과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전 세계 금융기관이 몰려들게 만들었다.

   이우의 한 3층 건물에 들어갔더니 끝도 모이지 않는 도매상이

   이 건물에서만 35만개의 상품을 취급하고 가장 싼 물건을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었다.

   이민교 선교사를 후원하는 와이비는 스카프를  수출하는 회사다.

   대형 전문화사가 수주를 주면 스카프를  수출하는 방식이다.

   그 곳에 바이어와 상담하는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 회사의 한국인 직원들 그리고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은 이미 호랑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창세기에 생명을 불어 넣었더니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이 숨은 하느님께서 주신 거다.

   이 숨을 모르고는 영적 자각이 일어날 수 없다.

   창세기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신성한 존재, 책임적 존재요

   이름 붙여 주는 사명을 주셨다는 거다. 나도 그런 의미에서

   이민교선교사를 후원하는 상품에는 특별히 이름을 붙여 보내달라고 했다.

   그 이름을 지(찌)라도(ZZIRADO, ..할'지라도'에서 )라고 정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사물을 이름 붙여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거다.

   인간은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하여 책임적 존재여야 한다.

   즉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둠과 상처와 환경에 성격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에덴동산의 아담은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

   인간은 이 세상 사람에 대하여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다.

   그 얘기를 하면 의구심을 갖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소우주의 중심을 세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고

   그 역할을 하시도록 안내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인간이 그런 힘을 잃어버린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기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인간의 근본적인 회복이 일어난다.

   내가 갖지 않은 그리스도적 자아로 거듭나는 게 거듭남이다.

   예수님은 성만찬 때 이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빵을 들어 찢어 주셨다.

  ‘이것은 내 찢어진 몸이다’며 일일이 제자들에게 빵을 다 주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이겠는가?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상징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갇혀 있다. 자신을 감옥으로 알고 산다.

   자기 감옥에 갇혀있는 존재로 살지 말고

   성전처럼 모든 사람이 소통하는 성전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 상태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찢겨진 살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된다. 이는 소통과 교제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드림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하느님과 이웃과 만유와 연합된다.

   그 사건은 예수님께서 시청각 적으로 이를 보여주신 것이다.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선다는 게 무얼 의미하는가?

   자기 중심에 도달하지 않으면 늘 곤고할 수 밖에 없다.

   이성과 감성과 의지가 어떻게 하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지가

   에니어그램 수련의 핵심이기도 하다.

   역사 속의 예수가 하늘의 달이 모든 호수에 들어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가 보편적 그리스도로 임하는 일

   그리스도의 빛은 창세 전 부터 있어왔다.

   그 빛이 이천년 전에 예수를 통해 드러났다.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이 그리스도의 빛을 요한은 생명으로 표현한다.

   아인쉬타인이 빛과 에너지에 대해 설명하기를

   물질은 엄청난 에너지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한다.

   물질에 불이 붙으면 열과 빛이 난다.

   아인쉬타인은 물질이 에너지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공식으로 표현했다.

   빛은 입자로 되어있다. 작은 덩어리로 되어있다는 거다

   이것이 광자, 빛의 입자학이다. 이는 가히 물리학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물질에서 에너지로의 변화, 소멸되는 게 아니라 에너지화해서 빛의 입자로 된다.

   하느님의 창조의 섭리는 우리 눈에 있던 것이 사라지고

   사라진 세계에서 다시 일어난다.

   물질이 에너지가 되고 에너지가 물질로 변하면

   에너지가 없어지거나 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만물은 늘 새로워지고 있다.

   눈에 안보이는 세계, 없었던 것들이 태양과 물의 합성에 의해서

   풀과 나무로 변화된다.

   물질이 에너지가 되는 것처럼 보편적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있었고

   이천년 전에 역사 속에 그리스도로 오셨고

   생명으로 빛으로 아빠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셨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너희가 곧 이 세상의 빛이다.

   과학적으로 보면 빛의 덩어리로 나타난다.

   인간은 고체덩어리가 아니라 빛과 에너지체라는 게 물리학의 상식이다.

   "너희가 내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면 내가 한 일을 너희가 할 것이고

   그보다 더한 일을 할 것이니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명, 즉 그리스도적 사명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사명을 감당하고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면 나를 통해서 이루실거다

   하느님이 주신 믿음을 믿어라.

   성만찬을 통해서 빵을 나눠 먹는다. 예수님이 찢어 나눠 주신 것인데

   내 몸과 삶을 나눠주며 살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뜻을 알면 에고에 쌓인 나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예수님의 몸을 독점하면 다시 말해서 나를 나누지 않으면

   예수님을 거역하는 거다. 그리스도를 종교 안에 가두는 거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적인 몸이다

   시공을 초월한 몸, 그런 몸을 시간과 교회에 가둘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성한 그리스도의 몸을 찢어 나눠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도 내 삶을 찢어 나눠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빛을 필요로 하고 그리스도의 나눠진 몸을 필요로 한다.

   나눠진 몸은 빛과 생명이다.

   빛이 각 사람에게 여러 가지 빛깔로 나타나는 것처럼

   용서가 필요하면 용서로 혹은 화해의 몸, 지혜의 몸으로, 이걸 간구해야 하고

   혹은 부활의 몸으로 열정이 필요하면 열정의 몸을 간구해야 한다.

   내가 부족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일까?

   그걸 채워주는 몸일 때 의미가 있다.

   나에게 힘도 의미도 주지 못하는 예수는 버려라.

   그리스도의 몸은 나에게 목적을 가진 몸으로 찾아 오신다.

   동물 의식에서 신성한 의식으로 나를 세우고

   가면을 쓰고 위장하는 성격을 초월하게 된다.

   깨어있다는 것은 무엇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 지를 알아차리는 거다.

   70 넘은 기권사님은 배움의 열정, 그리스도께서 열정의 몸으로 오신다.

   내가 힘들고 피하고 싶은 것 그것을 하고

   내가 계발해야 할 영역에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그래야 크게 발전한다.

   1%가 100%의 변화를 가져온다.

   한 존재가 양쪽 날개를 쓰고 새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나눠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지 어떤 빛인지

   의식하고 자각하고 채우기 위해서 영적 진보를 계속해야 한다.

   이천년 전의 과거의 예수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예수

   시공을 초월해야 할 나我라는 존재가 얼마나 놀라운가?

   예수님의 가치를 올린 요한 사도가 고맙다.

 

   예수님이 떡을 떼서 나눠주신 의미가 무엇인지

   마치 스승이 전법의 표시로 의발을 전수하는 것처럼

   몸마저 내어주는 스승의 제자를 향한 아름답고 신비스런 장면에 눈이 떠집니다.

   그리스도의 신성한 몸을 받은 사람들과 그 행위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그의 몸도 신성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대체 인간이 무엇이건데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것을 인간의 몸 속에 넣어 주시고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떼어 인간에게 나눠 주셨습니까?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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