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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는 시간 "지금"

2013.06.08 16:12

구인회 조회 수: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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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눈을 돌리는 시간 "지금"   


 

공자가 위나라 위령공(靈公)의 왕후 남자(南子)라는 여인과 접견했을때

자로 子路는 스승이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인을 만난다고 대놓고 꼬장을

부립니다. 도무지 말이 안 통하고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제자에 대하여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지요.

한 스님이 면목이 없는 말투로 당대 唐代의 대선사 조주에게 말합니다.

"이렇게 빈 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이만 내려 놓게!"

"아무 것도 가져 온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려 놓는단 말입니까?"

"그럼 계속해서 들고 있게나!"

스승 공자 앞에서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열을 낸 자로나 조주 趙州앞에서 

생각에 갇힌 신출내기 스님이나 말 못 알아 듣기가 매 한가지.

예나 지금이나 내 말만 하고 남 말 못 알아듣는 점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상대방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 상심해서 서로 멀어지고 서먹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업장인 양 되풀이 되는 현실 속에서

물님을 통해서 되살아난 안스러운 예수님의 처지가 위안이 됩니다.

이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아쉬움이 될 것 같아 게으름 속 마음을 냅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

을 정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동네에 방을 구하러 미리 심부름꾼을

보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돌아왔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는 말을 듣고 그 마을 사람들이 일행을 맞아 들이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태워버릴까요?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 눅9:51~56"

 

성서를 통해서 불을 내린 적이 언제 있었는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사제 450명과 대결할 때 불을 내려주시도록 간구함으로써

이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치 이 장면을 연상케하는 제자들의

도발적인 발언 속에서 불을 내려달라고 하는 야고보와 요한이 오히려

불에 타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그걸 보시고 그 분노의 불길이

너희를 사르고 있다고 그들을 책망한다. 사람들이 그 모양 그꼴이다.

성질 대로 안 되면 아무에게나 성질을 내고 하느님한테까지 성질을 낸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일시적인 것을 가지고 화 난 상태에서 이를

더 확대하고 증폭해서 나가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은 무척 고무돼서 간덩이가 좀 부은 것 같다.

이들을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작정을 한 예수님이 곧 정치적 메시아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으로 내다 본 것 같다. 장차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왕이 되실텐데 감히 왕이 되실 분과 그분을 따르는 우리를 몰라

보고 우리들 알기를 개똥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하여 성질이 더 난거다.

이제 대권이 눈 앞에 있는데, 제자들의 태도로 짐작컨데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상당수가그 분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병자, 가난한자를 위해서 왔다고 계속 얘기하는데도

그들에게는 그 얘기가 통 들리지 않고 예수님을 매개로 하여 로마와

한 번 붙어 볼만한 분노의 에너지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 대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성서의 사본이 있다.

예수님이 제자를 꾸짖으시면서 "너희는 너희 자신이 어떤 영에 속해 있는

지 모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내가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온 것인데 너희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예수님 심정이 기가 막힐 것이다. 마지막까지 오해하는 제자들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편견도 대단하다. 사람들을 보면 정말 말을 안 듣는다.

자기 말만 하니 상대에 대해서 공감하는 게 없고 그냥 습관적으로 산다.

살다 보면 성질 날 만한 일이 어디 없겠는가? 그럴때 내가 그 순간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잘 들여다 봐야 한다. 진리의 영, 성령의 영에 속해

있는지 봐야 한다. 그걸 모르면 우리는 자기 안에 입력된 대로 반응한다.

이 기계적 상태에서 벗어나 나를 주시하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붓다 표현에 의하면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들,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대하는 편견을 가지고 대응한다

인간이 이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자유가 없다.

장자는 진인무몽 眞人無夢, '참 사람은 꿈이 없다."고 했던가.

인간의 속성이 자기보다 크던가 깨끗하던가 하면 욕을 먹게 된다.

우리는 그 당시 정황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정말 그런 것인가?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 자신이 못 박힌 것이다.

형제를 죽인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죽인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가 아니다.

군중과 빌라도, 제사장들이 자기 자신을 못 박는 불쌍한 짓을 한 것이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해달라."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진정 깬 분이다.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못 박혀 죽이는 편견

그런 세상, 어둠의 세력에 빛을 빚을 수 있는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돌 맞은 사람이 사실 돌을 던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타인을 저주하고 비판하거나 욕하지 말라고 했는데,

불행히도 삶의 순간순간 우리의 영이 어디 있는지 놓칠 때가 많다.

그분은 타인을 정죄하지 말라고 넓게 쓰라고 하는 데 가슴에 공간이 없다.

우리는 그분의 삶과 말씀 처럼 가슴의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

우리 가슴의 여러 공간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 지가 중요하다.

가슴의 쓰레기를 치우고 가치 있는 것으로 거룩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내 영혼의 주소를 어디 두고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원위치해야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슴 공간을 정화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녹색의 에너지 파동에 거하며 자연을 가까이 하는 게 중요하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사람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버림 받은 사람 하나도

버리지 않고 살리러 왔다고 해고 제자들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자, 그런데 누가복음에 굉장이 중요한 표현이 있는데 번역이 안 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그 쪽으로 눈을 돌리셨다."는 말이다.

이세종 선생은 때가 되어 생을 여의려 할 때 곡기를 두달을 끊고 가셨다.

동광원의 박남금 언님도 103세에 이르러 곡기를 끊으시고 옷 한벌,

홑 이불 베게 하나, 계실 때 쓰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가셨다.

ㅇㅖ수님의 삶에서 삶을 보고 복음에서 복음을 보고 부활에서 부활을

바라보고, 내 할일이 이거구나, 이걸 보는거야, 어느날 예수님 바라보니까

길이 정해진 것이다.

 

마더 테레사는 상류층 생활을 누리고 산 사람이다.

부족한 것이 없이 살면서 살았는데, 어느날 길을 가다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여자를 만났다. 이 여자를 데리고 병원에 갔는데,

수술 하려면 돈 부터 내란다. 돈이 없다 보니 병원을 전전하면서 

세번째 병원에서 임종을 맞았다. 이 순간 부잣집 자녀만 상대한 테레사의

눈길이 돌려졌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눈을 어디에다 두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님이 갈 때가 될 때를 아시고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내 영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눈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눈을 돌리는 시간이 "지금"이다.

 

밤 중에 부는 폭풍처럼 어둠 속에 봉인되어 버릴 물님의 말씀 한자락을

간신히 꺼내 놓으며,

불타고 있는 불재의 촛불과 같이 빛 속의 아픔을 알아듣지 못하고

이 눈을 돌리는 "지금"을 놓친 고독한 군중이 되어

다시금 영성과 격리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추방된 땅으로 돌아가는 게

한 인간의 고뇌요 비참입니다('13.5.26)

                                                                              

 

                                                 's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