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272683
  • Today : 1036
  • Yesterday : 708


Ai Xuan(艾軒) "소녀의 눈동자"

2011.03.01 10:36

구인회 조회 수:2630

 untitled.jpg 

0.jpg

 

00.jpg

 

2.jpg

 

2-1.jpg

 

3-0.jpg

 

3-1.jpg

 

3-2.jpg

 

3-3.jpg

 

3-5.jpg

 

4.jpg

 

4-1.jpg

 

5-0-0.jpg

 

5-0-1.jpg

 

5-0-2.jpg

 

5-2.jpg

 

6.jpg


6-1.jpg

 

7-1.jpg

 

7-2.jpg

 

8-2.jpg

 

aixuan_06.jpg

 

 

                                                       

                  

                 에이쉬엔( Ai Xuan) "소녀의 눈동자"     


 

 이 세상은 문명인이라 일컫는 배운자에 의해서 창조되고 그 배운자에

 의하여 또 파괴되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인류가 배움을 지향한 이래 배움이란 힘과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짐승의

 단계에서 벗어나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익히게 하는 유용한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우리 사회가 잘되는 길을

 가기는 커녕 사람위에 서서 사람을 내맘대로 부리고 가두고 통제하려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생겨나니 말입니다.

 살인귀 아돌프 히틀러,  도살자 스탈린,  동아프리카의 백정 이디아민,

 희대의 학살 기획가 폴포트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무식해서 그런다면 몰라도 이른바 많이 알고 많이 배웠다고 하는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런 일들이 자행되니 잘 못 배웠다고 치부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나 가혹하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컨데 종교적인 분쟁만 하더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과 섬김을 말씀하신 예수 믿는 사람과 자비와 깨달음을 말씀하신

 부처 믿는 사람들이 서로 옳다고 쌈박질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싸운다는 말인가요. 사랑과 자비는 같은 말인데  같은

 가르침을 전한 분들에게 배우고 믿는 자들이 서로 싸운다는 것이 무슨

 행태인가요.  2,500년 전의 부처님과 2,000천 년의 예수님이 동시대에

 만났다고 한다면 오늘날처럼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성질내고 핏대를

 세우시며 싸우실까요? 어쩌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부처님은 알라라 칼라마와  우다카 라마푸타로에게 가르침을 청한 것

 처럼 서로 극진히 존경하고 섬기고 성스러운 우주의 고리 안에서 이

 세상의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힘써나가지 않으셨을까요?

  

 인간에게 있어 배움이란 필연적이지만 그 배움이 일그러지고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얼마나 사람과 세상이 파괴될 수 있는지 자문하면서

 자연과 산경험 외에 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을 것 같은 티벳 초원의 어린

 목자 소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눈 맑은 소녀의 우수와 서정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고  애정이 가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중국 신고전주의 사실파 화가  에이쉬엔(Ai Xuan, 1947 ~  . )

 

 에이쉬엔에 대한 자료는 그의 그림 몇 점 외에 극히 희박하지만 그의

 알려진 일부 이력과 역사적 배경 및 경험으로서 그의 화풍과 구상을

 어림잡아 봅니다. 에이쉬엔은 저장성 출신으로서 67년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미술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하지만 권력투쟁 과정에서 마오쩌뚱의 중국 문화혁명(1966~1976),

 즉, 지도자 류사우치, 등소평 등 자신에게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세력을

 숙청하고 '하방'이라 하여 지식인들을 산간 오지로 쫒아내어 강제 노역을

 부과하던 암흑기, 에이쉬엔도 마찬가지로 화가란 이유로 아무 죄 없이

 오지로 쫒겨나 사년 간 강제 노역에 처해진바 있으며, 마오쩌뚱이 죽기

 이년 전 1973년에 복권되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문화혁명 당시 지식인들은 누구라도 평가절하 되었으며, 언제 홍위병에

 의해 숙청될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중국 역시 문화를 역행하는 가짜 잃어버린 문화혁명 10년 때문에

 국제적인 고립이 가속화 되고 사회주의 경제체계는 붕괴되고 맙니다.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시대를 목도하면서 에이쉬엔은 무슨 그림을

 그려낼 수 있을까요? 침묵과 복종, 노동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

 사상과 이념, 생각, 말을 잃어버린 시기를 겪으면서 그가 그릴 수 있는 건

 그야말로 낭만주의, 인상파, 현실주의, 상징주의와 같은 주관과 개성을

 과감하게 표현할 수 있는 미술세계가 아니라, 겉으로 웃고 속으로 우는

 표정 없는 표정, 말 없는 말과 암시, 극 사실적인 묘사 밖에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그림들은 너무나 정교하고 사실적이지만

 단 한작품도 역동적인 동작이나 밝은 표정과 웃음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같이 못사는 시대, 말과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특별한 배경없이 어린목자의 침묵과 슬픔, 체념, 비애의 잔영이 오래도록

 남을 뿐입니다.  

 

 그러더라도 이 에이쉬엔의 '티벳 목자 소녀' 그림에 끌리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자연의 장엄함, 눈 내린 초원, 티없이 맑은 소녀,

 그런 것이라기 보다는 목자 소녀의 '눈동자'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와락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동자

 에이쉬엔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느 그림이라도 그윽히 눈을 감고 있는

 그림은 없고 소녀가 왕방울만한 눈을 뜨고 뭔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림 마다 눈뜬  소녀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티벳 평원의 양치기 소녀의 맑은 눈을 통해서 함께 보고 

 그린 작가의 그리움과 소망일테고, 이 소망은 사람이 서로 나누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  그가 꿈꾸는 국민이 주인 되는 그의 조국

 중국의 장래가 아닐런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그것은 그가 자주 들른 티벳의 미래이기도 하고요.

 

 에이쉬엔 작품을 통해서 눈내린 티벳 초원의 적막함과 쓸쓸함

 눈 맑은이의 눈을 통해서 본 순수와 평화에 잠겨보시길 바라며,

 티벳의 옛 선인 '게셰 랑리탕파'의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옮깁니다. 

 

 소원을 들어주는 보석보다 귀한

 생명 가진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려는 결심으로

 내가 항상 그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언제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나를 가장 낮은 존재로 여기며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을 더 나은 자로 받들게 하소서

 

 나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살피게 하고

 마음 속 번뇌가 일어나는 그 순간에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나는 당당히 맞서 그것을 물리치게 하소서

 

 그늘진 마음과 고통에 억눌린

 버림받고 외로운 자들을 볼 때

 나는 마치 금은보화를 발견한 듯이

 그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누군가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나를 욕하고 비난하며 부당하게 대할 때

 나는 스스로 패배를 떠맡으며

 승리는 그들의 것이 되게 하소서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큰 희망을 심어주었던 자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 마음을 아프게 하여도

 여전히 그를 나의 귀한 친구로 여기게 하소서

 

 직접, 간접으로 나의 모든 어머니들에게

 은혜와 기쁨 베풀게 하시고

 내가 또한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은밀히 짊어지게 하소서

 

 여덟가지 세속적인 관심에 물들지 않아

 모든 것이 때묻지 않게 하시고

 또한 이 모든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달은 나는

 집착을 떨쳐버리고 모든 얽매임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s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