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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자방) - 초한지의 영웅

2014.10.28 08:39

물님 조회 수:959

 

중국의  유명한 명승지 장가계에 갔을 때  장량의 묘가  그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경의를 표한 적이 있다.   후한서에 등장하는  인물중에  최고의  전략가로 꼽히는  그는  공을 크게 세울줄도 알았지만  때를 알아  물러나야 할 때 물러 날 줄도 아는 인생의 지혜를  보여 주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고 해도 한신처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한 다면 그는  최고의 고수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난세에  병법을 아는 것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지혜를 얻는 첩경이 될 것이다. 

 

가난한 촌락의 건달이나 다름없던 평민출신 한나라의 유방과 귀족이자 천하제일 장사인 초나라 항우의 싸움은 항우의 승리가 분명했다. 하지만 천하는 유방의 손으로 넘어갔다. 유방의 승리 비결은 그 자신도 인정하듯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었다. 그에게는 전략가 장량과 군수를 책임지는 소하, 군사전략의 천재인 한신이 있었기에 항우를 이겼다는 것이다. <초한지>는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삶이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는 인생 교과서 같은 책이다.

 

장량(張良, ? ~ 기원전 189년)은 중국 한나라의 정치가이자, 건국 공신이다. 자는 자방(子房).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 건국의 3걸로 불린다. 유방(劉邦)으로부터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생애

장량의 할아버지인 장개지(張開地)는 전국시대 (韓)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등 3대에 걸치는 군주 아래서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도 희왕(釐王), 환혜왕을 섬기며 재상을 맡았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아예 장량의 조상은 한의 왕족이고 주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이었지만 진의 통일 이후 장씨(張氏)로 성을 바꿨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죽고 20년 뒤인 기원전 230년에 한이 에 멸망하여 집안은 몰락했고, 그때 아직 관직을 얻지는 못한 채였다.[1]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장량은 창해군(滄海君)이라는 자를 얻어 대화를 나눠보고, 힘이 센 장사를 시켜 기원전 218년경, 박랑사(현재의 허난 성 양장)를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고 무게가 120근(약 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쳤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은 그는 황석공이라는 인물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기》에 실린 관련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장량이 다리를 건너는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는 장량더러 가서 주워오라고 했다. 장량은 화를 참고 가서 주워다 공손하게 바쳤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발을 내밀며 신겨달라고 했다. 장량은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는데, 노인은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노인은 다시 돌아와 장량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닷새 뒤 아침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닷새 뒤 아침에 장량은 약속 장소로 갔지만, 이미 노인은 그곳에 와있었고 어른과 약속해놓고 그것을 어겼다며 장량에게 핀잔을 주고는 닷새 뒤에 다시 오라고 하고 가버렸다. 닷새가 지나서 장량은 다시 해가 뜨기 전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려 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장량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면서 다시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장량은 다시, 이번에는 아예 밤부터 약속 장소에 나가 노인을 기다렸고, 잠시 후에 나타난 노인은 장량을 칭찬하며 그에게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를 전해주며 "13년 뒤에 산기슭에서 네가 마주치게 될 노란 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훗날 장량은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장량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

이 황석공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지만, 장량이 누군가 스승을 두고 병법을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황석공이 장량에게 주었다는, 소위 태공망의 병법서라는 것이 현존하는 《육도》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육도》는 위, 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장량이 읽은 것은 현존하는 《육도》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하비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항우(項羽)의 숙부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온 것을 숨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가, 항량(項梁)에게 옛 한나라 공자 횡양군 성을 한왕(韓王)에 옹립하도록 했으며 한의 사도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죽자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고 이때부터 유방의 중요 참모가 되어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한신을 천거하는 등,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한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도와주었다.

한이 세워진 후에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후계자 문제로 여후에게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그 후에 유후(留侯)에 봉해졌다.


 

"봄 매화와 가을 국화는 피는 때가 다르다"는 말을 남기며 천하통일 후 일등공신의 부귀영화를 뒤로 하고 장량은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 옛 조선의 한 선비는 노래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리시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왕에게 버림받은 가운데에서도 선비의 기상을 잃지 않으려는 처연하지만 의연한 자세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2천여 년 전에 중국 땅에서는 흙을 털어 옥이 되는 순간에 오히려 흙으로 돌아간 선비가 있었다. 바로 나가고 들어올 때를 지켰던 한 사내 '장자방'이 그 주인공이다.  이 가을에 중국 역사상  최고의 책사요 전략가로 꼽히는 장량을 다룬 '장자방'  (이수광 저)을  추천한다.

 

 

 

 

한고조 유방은 숙적인 항우를 무찌르고 천하통일을 이룩하자,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일을 해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적으로만 보이기 시작했다. 항우를 치기에 전력을 기울여 싸우는 동안 유방과 손잡아 온 사람들은 기실 유방만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우선 큰 적부터 넘어뜨리고 나서 다음 기회를 보자는 것이 일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유방의 입장에서 볼 때, 장차 자기의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공로가 많고 실력이 두드러진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공로가 큰 장량(장자방)은 신선이 되겠다며 숨어 버렸고, 그 다음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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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                                                  (항우)

 

한고조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장막 속에서 수판을 놓아 승리를 천리 밖에 얻게 하는 데는 내가 장량만 못하고, 양식을 천리에 실어 보내 군사들로 하여금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만 못하고, 싸우면 이기고 치면 빼았는 것은 내가 한신만 같지 못하다."

 

결국 그들 세사람의 정치·경제·군사 전문가들의 지혜와 능력을 빌어 천하통일를 이룩한 것이었으니....

 

한신은 한때 반란을 일으키려 한 적도 있었다. 관상 잘보기로 유명한 괴통이 그로 하여금 반기를 들도록 권고한 것이다.

 

또 항우가 살아 있을 때는, 한신에게 동북부를 주고 중서부는 유방에게 그리고 남쪽을 항우가 갖자는 천하 삼분의 의논이 나온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유방으로서는 한신을 가장 무서운 실력자로 두려워했고, 또 그가 족히 반기를 들 수 있는 성격의 인물로 염려를 하고 있었다. 맨 처음에 유방은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다. 그러나 한신이 과거 항우의 용장이었던 종리매를 숨겨 주었다는 핑계로 한신을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시켜 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한고조는 회음후인 한신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지나간 이야기를 근거로 여러 공신들 중 군사를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누구는 만명의 군사, 누구는 10만의 군사라는 식으로 점수를 매겨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바퀴를 다 돌고 나서 한고조는 자기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럼 나는 얼마만한 군사를 거느릴 수 있겠소?"

"폐하는 10만의 군사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래?"

 

한고조는 약간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원래가 무식하고 욕 잘하고 혼자 잘난 체하는 성격인데다가 어쨌든 전쟁을 통해 천자가 된 그였는데, 한신이 겨우 10만명 실력 밖에 인정을 안했으니 마음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럼 경은 몇 명이나 거느릴 수 있겠소?"

"신은 多多益善(The more, the better)이올시다."

 

황제는 10만명으로 줄잡아 두고, 자기만은 백만명이 되든 천만명이 되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한고조는 약간 화가 났으나 그 화를 웃음으로 나타냈다.

 

"으하하하하........그런데 경이 왜 내게 잡혀오고 내 부하가 되었지?"

 

한신은 태연히 대답했다.

 

"신은 군사를 쓰는데 능하고, 폐하는 장수를 거느리는 데 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신의 말은 최고의 명언이었다. 장수를 잘 다루는 사람은 천자가 될 수 있고, 군사를 잘 거느리는 사람은 대장이 되는 것이다.

 

사실상 한신은 항우 밑에서 출세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항우는 한신의 지혜와 역량을 알지 못하고 썩혀두고 있었다. 그 한신을 발견한 것이 장량이었고, 그 한신을 추천한 것이 소하였지만, 그를 대장군에 봉해 삼군의 전권을 맡긴 것은 역시, 한고조 자신이었다.

 

그는 도둑질한 사람도 장수로 썼고, 형수를 데려다가 중매장이에게 팔아넘겼다는 사람도 데려다 썼다. 장량도 그를 하늘이 낸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한고조는 한마디만 하면 금시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한신은 이날의 대답에서도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한고조로 하여금 그의 거만한 생각을 알게 끔 만들었고, 그의 실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만들었다.

 

뒷날 사람들은 한신이 억울하게 반역으로 몰려 죽은 것도, 그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狡兎死良狗烹)

 

 황병국 편저『고사성어』에서 발췌  

 

병법서 목록

“낚싯줄이 가늘고 미끼가 분명하면 작은 고기가 걸리고, 낚싯줄이 약간 굵으며 미끼가 향기로우면 중간 정도의 고기가 걸리며, 낚싯줄이 굵고 미끼가 크면 큰 고기가 걸립니다. 무릇 그 고기는 그 미끼를 먹으려고 물다가 낚싯줄에 걸려 올라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녹봉(祿俸)을 받아먹으려고 그 군주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미끼에 따라 어떠한 고기라도 잡아서 죽일 수 있듯이, 녹봉의 많고 적음에 따라 어떠한 인물이든지 다 취하여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육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