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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평화 공동체, 참새 둥우리 - Sparrow's Nest

 

                                                                        김문음(작가)

 

      인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석 달 예정으로 인도 여행을 갔다가 8개월만에 돌아온 통신 모임의 한 후배는, 정보를 달라며 만남을 청한 내 앞에서,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직접 봐야한다는 뜻이었을까? 귀국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는 그녀는 예정했던 글을 쓰지 못한 채 시골 고향집에 요양 가 있다. 이러니, 겨우 일주일 남짓의 여행을 다녀온 내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프랑스의 석학이며 칼럼니스트인 기소르망(Guy Sorman, 저서 『간디가 온다』 Le G nie de l'Inde  )에 의하면, 로망 롤랑이 1936년에 간디에게 보냈던「인도의 얼이 서구의 얼과 화합하기를!」이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아니 21세기 초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유효하다. 서구가 물질을 정복하고 힘의 경쟁에서 승리한 사실이 자명하지만, 이러한 물질적 행복의 이면에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정신적 공허'를 느끼는 것 또한 자명하다. '또 다른 형태의 진보'를 위해, 우리는 인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29년 인도의 시인 타고르에 의해 '동방의 등불'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천민 자본주의에 발목 잡힌 듯이 보이는 한국에게 인도는 어떤 의미일까. 너무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또한 너무도 많은 '영감의 원천'인 거대한 땅 인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남인도의 작은 평화공동체, 참새 둥우리

 

 방문지인 남인도의 공동체, '참새 둥우리'(Sparrow's Nest)는 카르나타카 주의 주도인 방갈로르(Bangalore) 시에서 차로 약 2시간 정도, 120여 킬로 떨어진 방가라페트(Bangarapet)(기차가 다니는 마을이라 방갈로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라는 작은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6천여 평의 땅에 쌀, 라기(인도인들의 주식), 땅콩, 옥수수, 콩, 호박, 가지, 감자 등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 이곳은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교도, 기독교도, 사이바바교도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이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함께 예배하며 삶을 꾸려 가는 공간이다.

 

하루 일과는 오전 5시 30분에 아침 묵상과 예배, 8시부터 12시까지 노동, 낮 12시에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노동, 저녁 6시에 저녁 기도 시간으로 짜여져 있다. (예배 형식은 기독교식에 가톨릭 영향이 가미되어 있고, 대개 영어로 진행된다. 각자 자신의 고향의 언어로 찬양과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상주 인원은 워낙 들고남이 많은데, 내가 방문했을 땐 힌두 두 가족, 기독교인 세 가족이 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찾아오고, 다양한 나라의 방문객이 머물다 가는데, 숙식비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는 일본인 자매와 미조람의 한 가정이 석달 정도 머물다 갔다 하고, 2000년엔 경기도 그나라 선교회의 윤공부 목사님의 배려로 한 가정이 1년 동안 나눔의 생활을 하고 돌아갔다며 고마워해서, 반가웠다.

 

참새 둥우리에서 마을에 지속적으로 지원해 온 분야는 어린이 교육이다. 방가라페트엔 8개의 마을이 있는데, 돈이 생겨도 어른들 중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집이 많아, 참새 둥우리에선 현재 인드라나갈과 데쉘리 두 마을의 어린이 27명이 학교에 다니도록 도와주고 있다.

 

고운 모양을 벗고

 

  6년 전, 이 세계가 자연과 사람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치닫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방가라페트의 황량한 벌판에 작은 생명의 공동체를 시작한 이는 인도인 조셉 패트무리(Dr. Joseph Patmury) 목사와 그의 아내 한국인 백 글로리아 목사.

 

각각 신부와 수녀였던 이들은 이탈리아 로마의 울바니아 신학대학에서 선교학을 전공하며 만났다. 뜻이 통한 이들은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 85년에 결혼, 86년에 남인도에 들어왔고, 방갈로르에서 11년, 화이트 필드에서 3년 선교활동을 하다가 마침내 꿈꾸어 오던 대로 외진 시골마을 방가라페트에 둥지를 틀게 됐다.

 

케랄라 주 출신으로 4대째 신부를 배출한 명문 가톨릭 집안의 장남이요, 울바니아 신학대에서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조셉 패트무리는, 결혼 후 남인도의 기독교 교단으로부터 목사 인증를 받았다.

    인도의 기독교: 신자는 인구의 약 2.6% 정도.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에 전파된 것이 아니라, 1세기에 시리아의 성 토마스가 남인도에 기독교를 전파했으니, 그 역사가 깊다.  이는 16세기에 포르투갈 사람이 전파한 가톨릭과는 계통이 다르며, 남인도의 케랄라, 타밀나두, 고아 등에 뿌리를 내렸다.

한편 한국의 광주 지역에서 '맨발의 성자'로 불리던 이현필 선생의 제자 김준호 선생을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백 글로리아는, 이탈리아 울바니아대학을 거쳐 방갈로르의 싼 피터 신학원에서 다시 아시아신학을 공부한 후, 98년엔 한국의 기독교 교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험난한 새 길―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 다원주의 껴안기

 

기차 레일처럼 펼쳐져 있던 안전궤도에서 뛰어내린 삶―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새 길 위에서 "오직 주께서 인도하소서"하는 간구와 찬송이 더 절박해진다. 문자를 벗어나, 지식, 제도, 형식을 벗어나, 헐벗은 이웃이 있는 삶의 한복판으로 스며들기를 원했던 죠셉과 백 목사는 말한다. "나 자신이 위험한 변화의 물결 속에 투신하지 않고서는 결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지요."

 

그러나, '거대한 모순'―인도를 변화시키는 일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인도 정신으로 대표되는 '힌두트바'(Hindutva)―종교적으로는 '포용', '관용'의 대명사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완강한 계급제도, 배타주의를 고수하고 있고, 이 배타성이 인도인의 생활 전반에 깊이 작용하며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인도의 현실이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칙이 헌법상으로는 보장되어 있지만, 인도인의 실생활에선 무용하다. 인도인이 개종할 수 있다 해도, 불교, 이슬람, 기독교가 그가 속한 카스트로부터 개종자를 빼낼 수는 없다, 기독교인 파리아는 여전히 파리아인 것이다. 최근까지 가톨릭 교회조차도 카스트로 분류되어 있었다. (카스트 계급에 들지조차 못하는 불가촉 천민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불렀던 간디가 힌두 과격파에 의해 암살 당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카스트로부터, 심지어 '내재화된 카스트'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까마득히 요원한데, 설상가상으로 90년대 초에 정권을 잡은 BJP당은, 힌두정신을 인도의 민족정신, 민족주의와 연결시켜 강화시켜 가고 있다. (수개월 전부터 인도 구자라트 주에서 계속되고 있는 힌두-무슬림 간의 충돌도 이 같은 배경에서 일어난 것이다.) 기득권자는 대체로 변화와 평등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인도에서 예수를 전하려면, 예수님의 참 모습, 참 사랑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선교 성과는 함부로 말할 게 못 되죠. 이 사회의 다층구조를 알고, '사람'을 살려가야 하지 않겠어요? 한국 선교사들이 특히 신도 증가 실적을 자랑하는데... 실체를 알면 그렇게 쉽게 말못하지요..."

 

뼈아픈 얘기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한국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은 남인도에서도 쉽게 눈에 띈다. 선교는 구제활동과 병행이 되는데, 인도의 가난한 이들은 빵 몇 조각을 얻을 목적으로 기독교인으로 등록하고, '신자 불리기'에 주력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는 고국에 이 성과를 보고한다. 큰 충돌 없이, '한국 기독교 신자'로 등록된 이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지만, 내적 변화는 없다. 아니 있다. 구제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남을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기차역에서 만난 한 젊은이는, "K.G.F 같은 곳은 인구의 90% 이상이 기독교도가 된 기적적인 곳이에요. 그런데 어떤지 아십니까? 도둑과 사기꾼이 가장 많아서, 경계 1호로 삼아야 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 아닌가요?"하며 한탄했다.

 

빵을 먹는 일은 간단하지만, 말씀을 먹는 일은 눈앞에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문화적 배경이 다르다. 인도인들은 다신적 문화,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음식을 국물까지도 손으로 먹는 재주를 보라.), 냄새 맡는 것―'개념' 보다는 '감각'에 익숙하다.

 

백 글로리아 목사도 말을 이었다. "실은 같은 기독교인으로부터 상처를 가장 많이 받습니다. 한 영혼을 움직이는 게 어디 쉽습니까? 우리의 사역이, 나 자신이 순종하고 완전히 썩어지는 과정이고, 실로 '오래 참는' 사랑과 장구한 세월이 필요한 작업인데, 여기에 구호물자를 들고 잠깐 와서는 저희가 이방 종교에 대해 포용적인 입장을 취한다며 비난과 심판의 말을 퍼붓고 갈 때... 조 목사님과 많이 울지요."

 

내가 머무는 동안에도 한국 기독교인 몇 분이 참새 둥우리를 찾았는데, 한 젊은 한국인 여성은 그 예쁜 얼굴로 "아휴, 여긴 우상 숭배가 말도 못해요. 그러니까 가난하죠. 정말 여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나요?" 했다.

 

죠셉 목사는 그러나 한국의 '민중 신학'(민중을 minjoong이라고 그대로 발음했다)에 관심이 많다는 호의적 얘기를 들려줄 뿐이었다. (죠셉 목사는 세계 곳곳에 강연도 다니고, 에큐메니칼 신학계에 논문 발표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Play in Religion, Doing Theology with the Poetic Traditions of India 등이 있다.)

 

죠셉과 백 글로리아 목사 부부는 가난하고 낮은 계급의 사람이나, 힌두 지도자나, 부유한 파르시인(조로아스터교)이나 한결같은 존중과 사랑으로 대한다. 한번은 내가 백 목사님과 마이소르에 다녀오는 길에 화이트필드에 사는 명망 있는 힌두교도 집에 들른 일이 있다. 몇 해 전, 그 집 주인이 큰 병이 들어 위독할 때 그의 아내가 기도를 청해 백 목사 부부가 다니며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는데,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고 주인은 예수를 받아들였다. 그 후,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며 옷가지 등을 꾸준히 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이가 힌두교의 신을 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집에서 간단한 기독교식 예배를 드리면서, 백 목사님이 기도하고 내가 찬송 부를 때, 그 부부가 진정으로 정성껏, 기쁘게 예배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기소르망의 말을 떠올렸다. "인도에서는 아무 것도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추가' 된다."

 

"나, 당신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해 나의 신을 증거하고, 함부로 강요하진 않겠다. 결과는 신께서 주관할 것이고, 우리의 참된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이러면 안 되는가?

 

조셉 목사는 목사가 될 때, 대외적인 공고도 하지 않았고, 남인도 교단 쪽에도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소속―그것은 정의롭지 않은 일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자유선언임과 동시에 세속적으로 힘없는 외톨이가 됨을 의미한다.

 

험난한 새 길 - 모두‘주인’이 될 때까지

 

황량하던 벌판에 생수가 솟고, 숲이 우거지고, 오곡백과가 만발하고, 새들이 깃드는 체험 속에 하루 하루가 은혜요 기적이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삶을 나누는 과정은 끝없이 인내를 시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한번은 주일 예배를 드린 후 나와 친하게 지내던 아줌마가, 영어를 썩 잘하는 수레쉬라는 청년을 가리키며 '그는 단 한 번도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유일한 청년'이라고 내게 자랑을 했다. "Oh, my God, 그럼 다른 청년들은?" 나는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봐야 했다. 목사님 내외가 굳이 표현하지 않은 숱한 사연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도에는 400개가 넘는 언어가 쓰이고 있다고 한다. 작은 공동체인 참새 둥우리 안에도 영어, 힌디어, 한국어, 벵갈어, 까나다어, 타밀어, 말리알룸어, 텔레구어 등 8종류 이상의 언어가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일꾼들끼리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흔히 발생한다.

 

  백 목사 부부에겐 아기 때 입양한 인코(인도와 코리아의 앞 글자를 땀)라는 이름의, 올 해 열한 살 난 딸이 있는데, 인코는 8종류의 말은 다 구사할 수 있는 작은 통역사다. 인코를 보면, 조셉 목사님 말씀대로 우리가 언어, 인종, 국적을 넘어 'human being'으로 화합하여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의 싹을 보는 것 같다.

 

  인도 여성이 처해 있는 열악한 현실도, 참새 둥우리가 계속 관심을 갖고 있으나 개선이 요원한 문제 중의 하나다. "이곳에선 아직도 여성들이 지참금을 갖고 시집을 오지요. 그 돈이 떨어져서 남편의 구타가 시작되면 친정에 가서 돈을 구해오는데, 친정도 가난하고 대책이 없으면 차라리 자살을 하는 여성들의 많아요. 어차피 죽을 정도로 맞으니까..." 이런 여인들의 자살-사회적 타살인-이 방가라패트 근교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또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남녀가 머무는 곳이면 발생하는 사고도 골칫거리다. 조금만 한 눈 팔면, 자매 하나가 임신을 한다. "여자들이 반항하지 않나요?" "반항? 이곳 여자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순종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남자에게 대들기가 쉽지 않죠."

 

마을마다 거리마다 거의 모든 여성들이 걸치고 있던 아름다운 빛깔의 사리들, 머리에 장식한 쟈스민 생화의 향기... 내게 인도 여인의 모습이야말로 하나의 매혹이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지킨다는 것과 '여성의 인권'을 찾는 다는 것은 배반 관계인가?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백 목사 부부는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참새 둥우리를 지금까지 키워주시고 앞으로도 돌보아 주실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웨슬리와 루트 마리아를 보세요. 이들도 처음엔 모든 면에 서툴렀어요. 하지만 아주 영특하게 성장해서 이 공동체를 잘 이끌다가, 오늘 떠납니다. 조 목사님이 타밀나두에 참새 둥우리 같은 또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었는데 이 두 사람이 그곳의 리더를 맡게 되었죠." 희망을 얘기하는 백 목사의 표정이 밝다.

 

나는 짐짓 딴죽을 걸었다. "힌두인은 이상적인 삶을 네 단계로 나누어 말한다더군요. 학습기, 재가기(결혼, 생업 등), 임서기(묵상, 공부, 종교적 삶에 집중), 그리고 마지막 단계를 '포기기'라고 해서, 집을 떠나 구걸하며 산야신(출가수행자)이 되어 다닌다지 않아요? 만약에 어느 날 조셉 목사님이 산야신이 되기 위해 집을 떠나겠다고 한다면 어떠시겠어요?"

 

백 목사가 태연히 답했다. "그것도 좋겠지요. 제게도 그러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하지만 전 아무래도 요즘 제가 공부하고 있는 스리랑카 신부님의 이 말이 좋네요. '아무리 예수님이, 천국이 좋아도 우리 형제, 자매 없는 곳엔 가고 싶지 않다'는..." (Aloysius Pieris)

 

순례자의 길

 

참새 둥우리는 아직 허약해 보인다. 공동체를 이끌어갈 인재도 아직 부족하고 (백 목사는 한 6개월이라도 공동체를 위해 순수하게 봉사할 이를 구해봐 달라고 부탁했다.) 후원에 의지하는 재정 기반도 불안해 보인다. (참새 둥우리의 파워는 오직 '섭리'라고 한다. 다행히, 이름 없이 후원하는 참 크리스챤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백 목사는, 인도의 다른 영성센타처럼 '비즈니스적인 요소'가 틈입하면 안 된다며, 가난하고 순수한 영성을 지켜갈 수 있게 기도해 달라고 했다. 참새 둥우리라는 작은 불꽃, 평화의 공동체를 통해 감히 인도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힌두교 만신들을 보면 이질감을 느끼는가? 내 경우, 확실히 그렇다. 내가 만난 인도의 '사람'들은 전혀 낯설지 않고, 어제 만난 사람처럼 놀라울 정도로 감정 소통이 잘 되지만, 특히 다산(多産), 성적(性的) 이미지가 강조된 힌두교 조각상들을 보면 특이하거나 조잡한 예술품일지언정 종교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책에 나오는 서구의 여행가들처럼, 기독교인은 '히브리적 적개심'을 경험하기 십상이다.)

 

그러나『바가바드 기타』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오던 간에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라는 전언의 의미, 신과 다양한 인간 사이의 교량의 의미를 수용할 수 있다면, 힌두교 만신들과의 화해도 가능할 것 같다.

    당신은 수용할 수 있는가?

    '인도의 관용'과 공존할 수 있는가?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 세속의 파워를 가지라고, 정복자가 되라고 부추기는 저 서구문명의 유혹으로부터(간디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대로) 우리는 자신을 정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성찰의 질문이다.

 

인도 말에 '건너다'는 의미의 'tirtha'는 여울목, 성스러운 장소의 뜻이었다가, 자신이 바로 건널목이 되는 성스러운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오늘, 티르타인가?

     

     

                                       http://saegilchurch.or.kr/quaterly/sg02su/02sucommunity.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