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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

2011.06.30 21:37

삼산 조회 수:1069

1987년 6월항쟁

 

  광주의 피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의 7년 임기가 끝나간다. 민주화 세력은 이번에야 말로 독재를 끝내고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는 역사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점점 더 민주화 투쟁의 강도를 더해 갔다. 그 중의 하나가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 전국 26개 대학 2,0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외세 반독재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하여 독재정권은 이틀 후인 10월 30일 북한의 금강산댐의 위험을 대대적으로 발표하여 그동안 수없이 써먹어 왔던 전쟁위험의 카드를 또 사용하였다.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사기극을 펼치면서 국민을 협박하고, 그것을 빌미로 건국대학교에서의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정권을 연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함에 처해있는 독재 권력과 이번이 민주화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민주진영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독재정권은 지속적으로 금강산댐의 위협을 과장 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국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바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고문치사사건은 사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은 아니었다. 그동안 박종철군 처럼 비명에 죽어간 이가 하나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것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매우 높아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독재를 끝장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던 시기에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번에는 비교적 기회주의적이고 나약한 전문 지식인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종철의 부검의(剖檢醫)였던 중앙대학교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吳演相)씨가 박종철 군의 죽음이'고문치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黃迪駿)씨의 부검소견서가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다는 증언이 뒤따랐다. 역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보도한 언론이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민주세력은 박종철 군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힘을 모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역시 독재 권력도 절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제 이한열군의 중상을 더 이상 시대가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그의 친구 이종창군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정태권 기자의 카메라에 잡혔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하면서 그것을 신문에 게재한 이창성 사진부장이 있었다.

 

  지식인들은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약하고 비겁한 지식인들이 용기를 냈다. 오연상, 황적준, 정태권, 이창성을 기억하자.

 

  얼마나 기다렸던가? 국민들은 정말로 참고 기다렸었다. 그동안 민주화 투쟁을 계속했던 이들도 당장의 민주화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때를 기다렸다. 그냥 기다리면 이때도 안 될 것 같으니까 열심히 투쟁했었다.

그동안 국가는 그 누구보다도 더 끔찍한 폭력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국가는 가공할 폭력기관이었다. 국가 폭력으로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우선 5.18 광주에서 피의 학살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정보원에서, 군 보안사에서, 경찰에서 죽어갔다.

국가는 그 누구보다도 큰 거짓말을 했다. 온갖 정보조작과 여론조작으로 국민을 속이고 선전 선동하였다.

언론인의 입에는 재갈이 물렸고, 정의의 양심은 반쯤은 도려내져 있었다. 조직화 되지 못한 농민들은 큰 손해가 나도 자신의 무능을 탓했고 노동자들은 생계의 위험에 침묵했었다.

 

  독재자 전두환은 7년 단임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적으로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군부 내에서 권력을 승계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법대로 한다면 또 체육관에서 거수기들을 동원하여 거의 만장일치로 또 다른 독재자가 등장할 것은 뻔한 일 이었다. 그것만은 차단해야 했다.

1985년부터 정치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가 시작되고 1986년부터 구체적인 개헌투쟁이 시작되었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재야는 재야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생각이 있는 이들은 모두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열망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투쟁도 하고 항거도 하고 말도 했다. 분함과 원통함을 이길 수 없는 이들은 제 몸에 불을 질렀다. 살짝만 스쳐도 눈물과 콧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고성능 최루탄, 그 연기가 안개처럼 깔려있는 아스팔트 위에서 민주화의 전사들은 화염병을 날렸다.

1987년 연말에는 대통령을 새로 선출한다. 국민의 염원도 컷지만 살기위한 군부독재의 뜻도 강했다.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호헌을 선언했고 이어서 1987년 6월 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하였다. 바로 그날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은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6월 항쟁의 최절정일인 6월 26일에는 33개시 4개 군과 읍에서 180만 명이 시위에 가담하였다. 드디어 독재정권은 6월 29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민은 이한열군의 장례식을 통해서 독재정권의 항복에 쇄기를 박았다.

 

  독재 권력의 6.29선언, 그것에 대해서 혹자는 전두환의 작품이라 하고 혹자는 노태우의 작품이라 하고 혹자는 미국의 압력이라고 하지만 어림없는 말이다. 국민의 민주화 투쟁에 독재 권력과 그 배후 미국이 굴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