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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여우신 하나님

2011.07.17 13:18

삼산 조회 수:1067

가여우신 하나님

 

 

 

  탄탈로스는 목까지 차 오르는 물 속에 서 있었지만 결코 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머리 위에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뭇가지들이 늘어져 있었지만 그가 과일을 따려고 손을 뻗는 순간 나뭇가지들은 이내 그의 손에서 멀어졌다. 왜 그는 이런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영원을 살아야 할까?

 

  그는 신들을 공경했다. 너무도 신을 공경한 그는 신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어떤 것도 신들에게 내놓기에는 제 스스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신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가장 귀한 것,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그의 아들 펠롭스 였다. 탄탈로스는 그의 아들을 삶아 국을 끓여서 신들에게 대접했다.

오! 그러나 신들은 그의 선물에 진노했다. 격노한 신들은 탄탈로스를 지하 세계의 처벌 장소로 던져 버렸다.

 

  <이야기 신학> 21호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에 도전한다” 라는 제목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룬 적이 있다. 그 때 어떤이가 그 글을 보고는 “교단에서 징계하지 않느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다. 나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그 때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는 모든 기독교인은 물론 유대교인, 이슬람교도들에게까지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 받는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번제로 바친것이 그의 믿음의 증거가 되었다. 비록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만류로 이삭이 제물이 되는 것은 모면했지만 이미 번제로 바친 것이나 마찬 가지였다. 탄탈로스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는데 아브라함은 영원한 축복을 받았다. 무엇이 다른가?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으며 무엇이 생략되었는가?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제물을 혐오했고 하나님은 인간제물을 지극히 기뻐하셨는가?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제물을 기꺼이 받으셨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인간제물을 철저히 금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예외였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당신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한다면 마땅히 당신도 아브라함처럼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아브라함처럼 행한다 할 때 "아! 그는 참 훌륭한 신앙 인이다."라고 찬양할 수 있는가? 이를테면 어떤이가 지난밤 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는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아들을 데리고 꿈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으로 가서 제물로 바쳤다면, 그것이 신문에 큰 기사로 나고 방송에 뉴스로 다루어졌다면 당신은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신앙인이 나타났다” 고 크게 존경할 것인가?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 사람을 “삐뚤어진 신앙”, “광신” 이라고 비난에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이니 성경으로 풀이해 본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이전에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 있었다. 그런데 사라가 이삭을 낳은 후 사라의 요구에 의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은 쫓겨나게 된다. 하나님도 거기에 동의 하셨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를 한때 누이라 하였고 그랄 왕 아비멜랙은 사라를 그의 처소에 들였다.(창세기 20장) 성경은 아비멜렉과 사라 사이에는 아무 일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난데없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계약을 맺는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아서 나와 내 혈육 일족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라는 것이다.(창세기 21장22-23) 과연 이삭은 누구 의 자식일까? 하나님과 아브라함, 아비멜렉, 사라만이 아는 비밀이다.

 

  아브라함이 견디기에 더욱 힘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삭을 적자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친아들 이스마엘은 내 쫓기고 이삭이 적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당한다. 네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다. 그 음성이 과연 하나님의음성인지 아니면 아브라함 자신의 바람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아브라함에게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 모양이다.

 

  아! 하나님, 당신은 아브라함에게 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몽니에 굴복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도전하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비위를 맞추어 주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투쟁의 역사다. 일반적으로는 자연과의 투쟁의 역사라 말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고 말한다. 역사는 절대주권자인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삐딱한 내 눈이 보기에는 하나님은 인간의 사악함과 무지함과 광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시면서도 징계하시기 보다는 인간의 비위를 맞추시고 달래시고 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는 어찌 보면 참 무르신 하나님이시다.

 

  역사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전의 역사다. 동시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양보의 역사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마땅히 진노하셔야 함에도 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악인의 악행에 순박한 이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할지 몰라 전전긍긍하시는 하나님이다. 나는 그러한 하나님이 불쌍하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폭군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인간의 폭력적인 도전에 굴복하시는 가엾은 아버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