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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한국을 친구의 나라, 피를 나눈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가?

 

이스탄불문화원에서 터키 참전용사 사진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 찍으며 만났던 분들

그리고 사진작업을 하며 터키에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느꼈던 의문들,

터키사람들의 한국이란 나라에 대한 깊은 관심,

우리보다 더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고 더 잘 알고 있는지,

그리고 왜 한국을 친구의 나라(칸 카르데시) 라고 하는 지에 대해

터키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터키는 그동안 종교에 관계없이 주변국의 전쟁에는 거의 참전을 했습니다.

서방측의 일원으로 말입니다. 1차 대전 역시 그랬고

한국전쟁에도 미국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참전의사를 표시했습니다.

참전의사를 표시한 바로 그날 터키의 국방장관이 라디오연설을 통해

한국전에 참전할 군인을 모집했습니다.

하루 만에 12,000명이 넘는 군인이 지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터키의 파병 예정 인원은 약 5,500명,

그래서 지원자 가운데 선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전국의 한 개 마을에서 1명씩을 선발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제가 사진 작업을 위해 터키 방방곡곡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젊은이들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로 보내지만 죽더라도

한 마을에서 한사람이라면 마을사람들의 협조와 도움으로

전사자 가족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터키는 대가족 제도로 사촌까지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런 전통과 비록 전쟁터에 나가 전사를 하더라도

한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슬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배려였습니다.

 

지원자 가운데 힘이 세고 능력이 뛰어난 군인을 우선 선발한 후

중복되는 경우에는 위의 원칙을 지켰던 것입니다.

당시 인구가 약 3,500만 정도, 터키 전역에서 약25,000여명이 참전을 하게 됩니다.

제가 만났던 분들 대부분이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긴 분들이었습니다.

악수를 하면 제 손이 아플 정도로 힘이 세었습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처음으로 터키 사람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터키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날 때 까지 매일 한국전쟁 소식을 라디오로 방송을 했습니다.

그날그날의 전사자 혹은 부상자는 물론 전시 상황이 어떤지 하는 것 까지도 방송을 했다고 합니다.

EBS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미망인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을 전장으로 보낸 젊은 새댁들에게는 라디오 방송을 듣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나무르의 아이세 두주균 미망인도 남편이 죽은 후 1년 반이 지나서야 남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미망인의 집에 단파 라디오가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이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소식을 들으려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렸을 적 옆 집에 가서 TV를 보듯 온 국민이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매일 한국전쟁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3년 동안 들었으니 처음에는 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랐지만

계속 듣다보니 알게 되었고 자신도 모르게 친근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터키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목숨을 바쳐 지켜준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손자가, 아들이, 아빠가, 오빠가, 남동생이, 이웃집 아저씨가, 삼촌이 젊은 피를 흘려 지켜준 나라,,,

 

우리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섭섭해 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저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섭섭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왜 혈맹이라고 하는지,

왜 친구의 나라라고 하는지,

이유를 모른 채, 50년이 흐른 것이지요.

2002년 월드컵이 없었다면,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조차 모른 채 지나갔을 것입니다.

 

제자가 원효대사에게 효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답니다.

원효대사가 대답하기를 “부모님 생각으로 가득한 것이 효니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생각하고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준 것에 대한 보답은 생각하고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만났던 터키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했던 자국의 참전용사 분들을 존중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위험에 처한 남의 나라를 도우러 간 그 희생정신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터키에서 참전용사 뿐 만 아니라 주위사람들이 나에게 베풀어주었던 친절,

가는 곳 마다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풀어 주셨던 그 마음을 이제 진정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 국민이 라디오 앞에 앉아서 한 마음이 되어 기도했던

그 마음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이유가 있었습니다.

맡은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돌아온 그분들을 존중하고 있는 그런 환경에서

자신들의 “이름 없는 영웅들”을 잊지 않고 찾아준데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사진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다른 분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온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자식이나 손자 혹은 친구의 무사귀환을 염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도 불구하고 750여분의 전사자와 3,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부산 유엔공원묘지에는 462분의 전사자가 묻혀있습니다.

물론 아이세 두주균의 남편 무스타파 두주균도 부산에 묻혀 있습니다.

 

올해는 에티오피아와 터키에 가서 사진전을 하기위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군은 올해가 참전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전시계획이 제대로 진행되면 에티오피아는 5월 첫째 주 쯤

그리고 터키는 6월25일부터 앙카라를 시작으로 이스탄불, 이즈미르 등에서 전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할 수 있는데 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 전시가 끝나는 대로 남은 나라의 사진작업을 위해 8~9월쯤 미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약 5~7년 정도의 예정으로 사진작업을 끝내고 돌아올 예정입니다.

 

처음 그분들을 만났을 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손과 넓은 가슴으로 꼭 겨안아 주시며 하시던 고맙다는 말씀과 눈가에 어린 눈물을 말입니다.

 

이 작업이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병용 드림

010-274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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