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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지킴이김호석 교수

울산시로부터 암각화 관리권 회수해야

 

2010.09.16 18:02 국민일보

 

 

45년째 물고문을 당하고 있는 국보가 있다.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 울산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변 절벽에 선사시대 인류가 새겨놓은 그림이다. 가로 10m 세로 3m 크기의 암면에 호랑이, 고래, 사람 등을 그린 290여점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이 바위그림은 1965년 수문(水門)이 없는 사연댐이 건설된 후 1년에 78개월은 물 속에 잠기는 신세가 됐다. 물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그림은 희미해지고, 바위는 부스러져 내리는 중이다. 지난 14일 오후 배를 타고 가까이 가보니 반구대 암각화는 윗부분까지 완전히 물 속에 잠겼다. 동행한 수묵화가 김호석(53)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한국 역사의 첫 장이 익사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물 속에 있는 바위그림의 비명이라도 듣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그림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돌 조각이 떨어져 나가요. 또 물이끼가 잔뜩 끼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어요. 국보를 이렇게 내버려두고도 대한민국이 문화국가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물이 빠졌다는 소식만 들으면 김 교수는 달려온다. 1981년 스물네 살 청년으로 반구대 암각화를 만난 후 근 30년간 계속 해온 일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이 10만장이 넘는다. 2006년에는 암각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 암각화 관련 박사학위 논문은 그의 것을 합쳐 2개뿐이라고 한다. 2008년 출간된 한국의 바위그림저자이기도 하다.

 

암각화를 보고 저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절박한 것,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 그 시대의 삶과 예술과 철학이 통합된 것, 그런 그림이라야 힘이 있구나, 그렇게 느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수십 년간 내가 붙들고 있는 질문이 있어요. 암각화를 그린 사람이 지금 나타난다면 무엇을 그릴까?” 98년부터는 외국으로도 나갔다. 암각화가 집중된 지역인 중국 몽골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을 돌아다니느라 보낸 나날이 1800여일이나 된다고 한다. 그의 집은 암각화 박물관이 됐다. 몽골이나 러시아 연구자들도 자료를 보러 김 교수 집을 찾아온다.

 

 우리 전통 속에서 지금 우리 시대에 유효한 형식이 있다면 그걸 살려내 국제화시키겠다는 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라고 말하는 김 교수가 한국 미술의 원형이라고 할 암각화에 이끌린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김 교수는 암각화를 가리키며 내 예술의 고향” “내 예술의 근거라고 했다. 화가로서, 또 연구자로서 수십 년째 물에 잠기고 부서져 내리는 암각화를 바라보는 심정이란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다산 정약용, 성철 스님, 노무현 대통령,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등 수많은 인물의 초상화를 도맡아 그려온 이 유명한 화가가 지난 10년간 암각화 살리기를 위해 그토록 비타협적으로 싸워온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물 빼라, 이 얘기를 10년간 해왔어요. 그런데 울산시 입장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국토해양부나 한국수자원공사에서는 사연댐 수위를 낮춰도 지금 당장 울산 시민들 쓰는 물이 부족하지 않다는데 울산시는 2025년 예상되는 용수 부족을 이유로 대체수원을 확보해 주기 전에는 댐 수위를 낮출 수 없다고만 해요.

 

 

 울산시의 지역이기주의에 국보가 볼모로 잡혀 있는 거죠.” 2008년 이후 대체로 합의된 반구대 암각화 보존 대책은 사연댐 수위 조절이다. 평소 댐 수위가 60m. 이걸 52m까지 낮추면 댐 위쪽의 암각화가 물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제시된 국무총리실 조정안도 사연댐 수위 조절 방안을 지지했다. 만약 수원(水源) 손실이 있으면 낙동강 물을 활용하거나 새로운 댐을 건설해서 해결하면 된다는 내용도 조정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울산시는 댐 수위를 낮추면 용수가 부족해지고 녹조가 발생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해 왔다. 대신 암각화 양 옆에 물막이 벽(차수벽)을 설치하거나, 뒤편으로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리는 대안을 내놓았다. 4월 문화재청은 자문회의를 열고 울산시 주장을 검토했으나 주변 환경 훼손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부적절의견을 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토목공사 등으로 환경이 훼손될 경우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영원히 물 건너간다고 말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해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울산시는 결국 손을 드는 듯했다. 수문을 설치해 사연댐 수위를 낮추겠다고 6월에 발표한 것이다. 수문 설치비용 150억원은 문화재청이 지원하기로 했다. 김 교수도 처음엔 환호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울산시 기자회견은 쇼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울산시에 왜 물을 안 빼느냐고 물었더니, 대체댐 건설을 전제로 수문 설치를 허용하겠다는 거였다고 하더군요. 대체수원을 확보해 울산시민에게 물이 공급되는 순간, 사연댐 수문 설치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거예요. 결국 기자회견은 여론 달래기용이었던 거죠. 최근에는 부시장이 차수벽 설치 얘기를 또 들고 나왔어요. 애초부터 댐 수위를 낮출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죠.” 암각화가 새겨진 암반은 점토가 굳은 광석 셰일(Shale)’로 구성돼 있다. 얼핏 단단해 보이지만 물에 약해 건조와 습윤이 반복되면 강도가 저하되고 토질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울산시의 용역을 받은 공주대 산학협력단은 비파괴 조사를 실시해 2003년 자료와 비교해 본 결과, 7년 동안 주암각면(그림이 그려진 바위 면) 23.8%가 훼손됐고, 그 주된 원인은 침수라고 지난 주 발표했다. 2003년 김 교수는 반구대 암각화 129곳이 훼손됐다는 사진 자료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위기 경보를 발령했다. 암각화 연구에 매달리면서 그동안 탁본 한 장 뜨지 않은 것도 훼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6·2 지방선거 때는 반구대암각화대책위원회와 함께 울산시장 후보자를 내자는 얘기도 나누었다고 한다. 시장이 바뀌지 않고는 암각화를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동안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요. 이제 울산시에 최후통첩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김 교수가 오랫동안 참아왔던 얘기를 꺼냈다. 이대로 가면 100년이 지나도 해결 안 돼요. 국보 관리 책임을 맡은 문화재청이 나서서 울산시가 갖고 있는 반구대 암각화 관리권을 회수해야 합니다. 남대문이 불타고 난 뒤 중구(서울) 대신 문화재청이 남대문 관리를 하잖아요. 문화재청장이 직접 울산시에 최후통첩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문화재청 역시 역사의 죄인이 될 거예요.” 그의 말이 반구대 암각화 문제를 풀 새로운 아이디어가 될지는 확실치 않다. 분명한 것은 물 속에 잠긴 바위그림 하나가 한국이 과연 문화국가인지 묻고 있다는 것, 그리고 김호석은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울산=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