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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가온의 편지

2010.09.06 16:44

물님 조회 수:5966

장아찌를 담그며 여름을 보냈습니다

 

가온의 편지 / 비워가기

 

 

길 건너 밭은 밭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여러 해 동안

말수가 없는 할머니 한 분이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밭 가장자리에다 우리 몫이라고 콩을 심어 놓고

우리가 미처 따지 못할 때는

손수 따서 갖다 주시기도 했지요.

 

 

8순이 훨씬 넘을 때까지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농사를 짓던 할머니가 기력이 쇠하여지자

대전에 있는 아들이 모셔 가고

그 후로 또 누군가가 그 밭에 농사를 지었는데

지난해에 시내에 산다는 밭주인이 나타나

감나무 밭을 만들겠다면서 농사를 못 짓게 하고

감나무를 40여 그루 심었습니다.

 

 

감나무라고 해서 어디 저절로 자라는가요.

처음엔 가끔 와서 물을 주기도 하고 풀을 뽑기도 했지만

지금은 잡초가 우거져 아예 잡초 밭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밭을 지날 때마다

“차라리 농사를 짓게 그대로 두었으면

지금쯤 고추와 콩이 꽃과 열매를 맺고

파 마늘 등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을텐데.."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작물이라도 제대로 가꾸지 못하면

밭의 역할을 할 수 없지요.

 

 

오래 전에 지인으로부터

‘목사 되어가기’라는 책을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그 책의 제목처럼

목사가 되어가기 위해

심장에 열이 날 정도로 살아왔지요.

 

 

가끔 숨이 막히는 이유는

모든 행동 앞에 엉뚱하게도 예수의 사상 보다

‘목사’라는 주어가 나를 지배할 때입니다.

 

 

‘목사가..’ ‘목사니까..’ ‘목사로써..’ 등등

목사라는 감옥에 갇혀 고되고 막막한 사역을

살얼음 같은 긴장감으로 해왔지요.

 

 

무덥고 긴 여름을 장아찌를 담그면서 보냈습니다.

오이장아찌, 양파장아찌, 고추장아찌 등

그 자체가 가진 장점과 특성인 매운 맛과

물기를 빼낸 후에

여름내 식구들의 입맛을 돋우는

맛깔스런 먹거리를 만들어냈습니다.

덕택에 올 여름 내 우리 식단은

온통 향토 웰빙 식단이었지요.

 

 

오이가 가진 물기,

그 신선하면서도 변질 될 수 있는

자랑과 오만을 소금물로 쫙 빼내

저장해 놓고 먹을 수 있는

오돌오돌하고 개운한 먹거리를 만들었습니다.

 

 

양파와 고추가 가진 특성,

상대를 짓누르고 죽이는 독성이 되기도 하는

그 매운 맛을 식초와 소금으로 삭히자

더위에 지친 입맛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비워내야 할 일입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는 쓴 뿌리 같은 자긍감으로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매운 맛과

오만과 자만의 물기를 빼내고 삭혀낼 일입니다.

 

 

성화란 높아지는 게 아니라 낮아지는 것임을 안다면

어떤 지도자의 자리에서든 위로만 오르려 하기보다는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날마다 죽어지면서

되어가기보다 비워가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좋은 뜻을 세웠어도

더불어 돋아나는 잡초를 보지 못하고

제거하지 못할 때에는

일년생 밭작물보다도 못한

잡초 밭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물 내리는 숲에는 초록 생명들이 비워가는 소리,

내려놓는 소리로 숙연해집니다.

우리도 그렇게 비워가는 삶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면

어디에서든 천국을 소유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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