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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편지

2009.11.06 23:25

물님 조회 수:6299

까치밥을 아시나요?

날짐승들을 배려한 인간의 사랑처럼... 늘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온의 편지 / 일(work)

 

요즘 같은 가을날은 날마다 쓸어도 주변이 온통 낙엽들 천지입니다.

 

그 중에서도 방석만한 크기로 툭!툭! 떨어져 슬슬 기어 다니는 오동나무 잎은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처럼 안쓰럽고도 정겹습니다.

 

할 일이 끝났을 때 생명력이 소진(消盡)되는 인생 역시 낙엽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이야말로 모든 동.식물의 존재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정신지체인 우리 가족은 유난히 '일'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그들에게는 '일'이란 힘들고 귀찮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미미한 자신의 영역이 일의 분량만큼 확대되고 자존감을 갖게 되는, 어쩌면 그동안 이들에게 누군가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을 하고 극단적인 말들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영역을 빼앗기는 것 같은 피해의식까지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나 역시 그 절망적이고 암울했던 젊은 날, 포도나무이신 그분의 예쁜 가지하나 되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염원했는지 모릅니다. 그 길만이 내 삶의 빛이요, 보람이었으며 궁극적으로 구원이었지요.

 

어려운 이들에게 방을 빌려주다 보면 건강한 몸으로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거기다가 수 십 년간 신앙생활을 했노라고 자랑을 하면서도 혹시 청소를 거들거나, 텃밭의 풀이라도 뽑게 될까봐 지레 겁을 먹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신지체 가족들이 노동의 성스러움을 깨닫게 해주는 '성자'라면 이들 역시 내게는 부정적인 삶으로 인한 곤고함을 가르쳐 주는 '성자'지요.

 

오늘 우리는 내가 숨 쉬며 살고 있는 자리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들을 영광스러운 특권으로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감당하고 있는가요?

 

마당을 쓸거나, 매일 정확한 시간에 대문을 여닫는 일이나, 설거지와 정해진 시간에 온수 보일러를 켜는 일들을 자랑스럽게 이행하는 우리 가족처럼 말입니다.

 

낙엽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랑스럽고 애틋한 발아(發芽)로 시작해서 눈부신 신록의 계절, 짙푸른 숙성의 단계와 여름날 따가운 햇살의 연단도 거쳤습니다.

 

그렇게 잎으로서의 사역을 모두 마쳤을 때 온 몸에 물이 빠졌으며, 그 때 나무에서 떨어졌고, 땅에 구르다가 흙속으로 스러져 가는... 잎의 과정은 언젠가 육신의 옷을 벗게 될 우리 인생과도 같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키었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여 두셨으니...'(행20:24)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갈 길을 다 가고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 예비 된 면류관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그 절망적인 십자가에서도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할 수 있었던 행복한 예수처럼 언젠가 그렇게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가을, 나는 플라타너스 가로수로 가야겠습니다. 화려한 단풍도 좋지만 잎을 떨구는 플라타너스의 멋진 분위기에서 이 가을이 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감상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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