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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아 우르

2013.03.09 08:46

물님 조회 수:6227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로부터 남쪽으로 400㎞ 지점, 유프라테스 강변에 높이가 20m 정도로 야트막하게 땅이 솟아오른 지역이 있다. 바둑판처럼 평평한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서 그 둔덕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그러나 1855년 영국인 테일러가 이라크 지역의 영사로 부임하기까지 그곳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테일러는 그곳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사람들을 시켜 그곳의 한 모퉁이를 발굴하게 했다. 땅을 파들어가자 놀랍게도 고대문자인 쐐기 문자로 기록된 토판 문서들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흥분한 테일러는 그것들을 고대언어 전문가에게 보냈다. 토판문서의 내용이 판독되었을 때,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 였던 것이다.

 

메스포타미아 지역은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주욱 유지되어, 지중해 까지 연결이 된다. 강이 겹치는 그곳에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땅이 유지가 된다. 메소포타미아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다. 그리고 시날평지 그곳의 끝 부분이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 우르지역이다. 이 유적지를 발굴중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발견되었다. 또한 많은 점토판에 완벽한 지도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주전 2000년께 수메르 문명은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중심은 ‘우르’였다. 당시 우르의 왕 ‘우르남무’는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법률 조항을 제정했다. ‘우르남무 법전’으로 불리는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최고의 법전이다. 도량형 문제,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문제,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는 문제 등을 다루었으며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적어도 200년 이상 앞선다.

 

우르의 역사에서 최전성기는 서기전 21세기 우르 남무(Ur-Nammu)왕 때였다. 우르남무 왕의 업적으로 지금까지 우르에 남아 있는 유적은 그가 세운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달의 신(月神)에게 바쳐진 이 거대한 탑은 현재 21m 높이 부분까지 남아 있어 오늘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다. 진흙 벽돌로 정교하게 쌓았고 벽돌 사이에 사용한 역청은 4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바벨탑의 모습을 추정케 하고 있다.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도시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 가족이 그곳을 떠나 문화적으로 낙후되고 지형적으로 척박한 땅 가나안으로 이주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막이 오른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메마른 가나안 땅에서 비옥한 문명도시 ‘우르’로 이주하는 것이 오히려 합당하게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정반대이다. 인간의 타산적 계산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우르의 발굴,새로운 아브라함의 발견"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은 우리가 알고있는 가나안땅을 떠돌던 유목민이 아닌 당대 최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의 법과 도덕,천지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이러한 엄청난 발견의 당사자인 울리(L.Woolley)는 1880년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고고학으로 진로를 바꿔 대학 박물관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대영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후원으로 1922년부터 12년동안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우르를 발굴하면서 세계적인 고고학자로 명성을 날렸다.울리의 우르 발굴은 성서고고학사에서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고고학자 울리는 우르의 지하묘지에서 무려 1850기나 되는 무덤을 발굴했다.대부분 부장품이 빈약한 평민들의 유골이지만 이 중에서 16기는 ‘왕들의 무덤’으로 불렸다.왜냐하면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만들어진 부장품이 너무나 고급스럽고 화려했기 때문이다.대부분 서기전 2600년부터 100년에 걸쳐 통치한 왕들이나 귀족들의 것으로 추정된 이 무덤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무더기로 쏟아졌다.특히 한 무덤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발견됐기 때문에 울리는 왕이 죽었을 때 신하들을 산 채로 매장하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함께 출토된 도장을 통해서 왕비로 추정되는 푸아비(Pu-abi)의 무덤에서는 라피스 라줄리와 카넬리안 같은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으로 된 머리 장식이 발견됐다.소나 양이 머리모양 황금으로 치장된 여러 개의 하프는 역사상 최초의 악기로 밝혀지기도 했다. 

 

울리는 단순히 화려한 무덤의 부장품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홍수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지하 무덤 발굴을 끝낸 1929년 그는 사방 20m 크기의 네모난 구덩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12m쯤 내려갔을 때 더 이상 유물들이 나오지 않는 바닥을 발견했다.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이런 바닥이 나오면 주거지의 기초로 여기며 발굴을 중단했지만 울리는 진흙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더 파내려갔고 3.5m 아래에서 또 다시 일상적인 유물들을 발견했다.울리는 이 진흙층의 연대를 서기전 3500년경으로 추정했고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에 언급된 대홍수의 증거로 규정했다. 진흙층 아래에서 발견된 1m 깊이의 주거지가 대홍수로 파괴됐다는 것이다. 갈대아 우르의 발견자라는 공로로 울리는 1935년 영국의 조지 왕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았지만,그의 해석은 아브라함의 고향에 관한 논쟁에 다시금 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