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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2016.01.24 07:35

물님 조회 수:1747



십자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마가복음 15: 37-38. 10: 35- 45


날이 갈수록 바라볼 수 있는 눈, 곧 안목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똑 같은 사물과 사건을 바라본다 해도 저마다의 눈이 다른 것은 보는 능력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몸서리치는 십자가의 처형장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침 뱉었지만 로마 군대의 백부장은 그 비참한 현장 속에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면서 "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구나 ! " 하고 고백하였다. 예수를 자신의 생각대로 믿는 사람도 있고 예수를 예수로 믿는 사람도 있다. 백부장은 예수의 장엄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영혼의 눈이 열린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교리를 믿는 신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열린 사람이면 저절로 깨닫게 되는 신비이다. 내가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보여지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이 어찌 나와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에 싸이곤 했었다. 나는 마가복음 15장 37-38절에서 이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

 

예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세 차례 예고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 (10:44-45 )


십자가 사건에 대한 자세한 예고는 세 번째 예고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과의 충돌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은 이 땅에서 예수가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좌의정과 우의정이 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인간의 권세를 행사하는 나라를 꿈꾸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속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권력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핵심이다. 예수께서는 높은 자리를 청탁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있는가? ' 물으셨다. 인간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의 잔과 피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물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난의 잔을 마시겠다고 대답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다른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다. 자신들이 차지해야할 자리를 뺏기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다툼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예수께서는 소란을 떠는 제자들에게 세속적 권력을 차지하고서 그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사례를 들어 교훈의 말씀을 하셨다. 권력을 폭력으로 남용하는 세상 권력자들과 달리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먼저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세속적 권세자와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밝혀 교회 공동체내에서 권세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종(둘로스 )은 노예이다.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순복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겸손한 의식이 있어야만 한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권세를 부려서는 안 된다. 교회의 권위는 사람들의 생명을 돌보고 성장시키는 데 있다. 오직 주님의 위임에 의한 봉사만이 있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섬김과 다스림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를 말씀하시면서 자기 자신의 삶이 바로 제자들이 살아가야할 사람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제시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삶의 연장선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인간의 삶의 내용은 그 사람의 죽음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의 본질적 의미는 목숨을 온전히 던져 사람을 살리는 '섬김'에 있다고 알려 주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께서 스스로 원하시고 선택하신 길이었다. 그는 목숨(프쉬케)을 속전(뤼트론)으로 내 놓으셨다. 프쉬케는 인간 내면의 깊은 영혼을 의미한다.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인류를 위한 섬김의 제단에 내놓으신 것이다. 뤼트론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도록 치르는 몸값으로서의 돈이다. 여기에는 이사야 53장 야훼의 종의 노래가 배경으로 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사람인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어둠과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사람이다. 심리적 영적 사회적 역사적 어둠의 십자가를 지고 밝은 부활의 빛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다. 어둠의 노예들에게 노예의 신분으로 찾아와 해방하고 구원하신 분이 주님이셨구나 하는 깨달음 속에서 나도 예수와 같은 사람을 살아야 하겠다고 분연히 일어서는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다.


십자가는 교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고자 했고 억압 없는 평화, 평등의 세상을 바라보았던 예수의 사랑 그 자체이다. 영혼을 바쳐 헌신 했고 가장 낮은 자의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예수의 사랑이 완성된 곳이다. 자비라는 단어의 의미처럼 가장 큰 사랑은 비극적 요소가 있다. 부모의 사랑도 하나님 사랑도 자비라는 뜻이 그러하듯 아픔이 있고 피가 묻어있다. 나도 예수처럼 큰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그러한 아픔 역시 끌어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하고 하나님의 자식으로서의 나로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고통이 축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신앙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영혼을 마지막 숨과 함께 내 쉴 때 성전 휘장이 찢어져 버렸다.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정치 종교 경제 질서와 결탁해서 피를 빨아온 성전의 질서가 한꺼번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막고 특정 인간만이 독점하던 종교적 공간의 질서가 끝장이 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빠 아버지가 되고 이 세상사람 누구나 한 아버지께 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예수를 불법으로 재판해서 생목숨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는 비정한 종교가 사실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못 박는 자멸의 짓을 했다는 것을 예수의 십자가와 빈 무덤은 증언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을 온 세상에 베풀어 주셨다. 그분이 목숨을 바쳐 내 쉰 그 영이 나와 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그 덕분에 나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세상 권력을 부러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심청이가 왕비가 되어 차려준 심봉사의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소경이 눈을 뜨게 된 것 처럼 덕분에 나도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