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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2010.09.29 23:50

물님 조회 수:1730

           나는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무가치한 조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가 누구인지 지금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르는 무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은 스스로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만물은 각기 성장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다. 자기 완성의 길을 최선을 다해 가고 있다. 생명의 법칙은 성숙이고 불어남이며 익어가는 것이다. 지상의 생명체들은 씨앗에서 출발해 열매로 되어가는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요한 12:24)

 

이 말씀은 밀알이 땅에 심기어지면 처음에 싹이 나고 그 다음은 이삭, 또 그 다음은 잘 익은 곡식이 되는 과정이 있는 것처럼 인간 역시 자기 존재의 ‘되어감(Becoming)' 을 통하여 영의 열매를 맺어야할 존재임을 통찰해 주고 있다.

 

 

예수의 기적은 생명의 법칙이란 풍성함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기적이란 무엇인가? 삶을 기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빵을 나누는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확장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한 알의 밀알이 60배, 100배로 불어나듯이 그리스도의 가슴에 접한 사람들은 그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불어나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빵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스도 의식의 빵을 나눔을 의미한다. 찢겨지기 전에 한 덩어리의 빵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은 육체를 나로 알던 의식에서 깨어나 ‘나’ 자신의 우주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한다. 몇 평 땅을 문서로 가져야만 무엇인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단계에서 아버지의 우주를 상속 받은 아들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이 떴는지 달이 떴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 가져야만 좋고, 누군가 알아주는 것에만 목을 매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열등의식과 자기 교만의식의 시이소에 올라타고 있어 삶이 분주하고 힘들게 살아간다. 한 마디로 맛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죄란 인생을 맛없이, 재미없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목표 없이 떠도는 부유물이다. 그들은 자신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은 저녁에 불재로 오면 곧 바로 별 볼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텐 에니어그램은 인간의 병폐란 자기 비하이며 그 원인은 나의 그 무엇을 나로 착각하는 데 있다고 통찰해 주고 있다. 세상의 직업이 내가 될 수 없다. 오직 ‘나’는 ‘나’일 뿐이다.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다윗은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성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달았고 그 아들 됨을 이루어냈다. 이 아들 됨의 절정에서 예수는 이렇게 고백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요한 10: 17-18)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가 아니다. 지금 나는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작지만 나는 더 큰 ‘나’로 되어가고 있다. 이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장차 우리가 될 바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가,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우리는 그와 같으리니, 우리는 그를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 일서 3:2) 여기에 ‘본다’는 말은 그처럼 된다는 것이고 그와 같이,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고백하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형성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가는 ‘나’를 만나가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상에서 바라보는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목표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은 무능해진다.

 

 내가 하늘 아버지의 자식임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생존경쟁 하나에만 모든 힘을 다 쏟다가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비젼을 갖지 못할 때 인간은 무능화, 경직화, 완고화의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집단 속에서 우리는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을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더욱 풀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한다. 나의 완고함이 풀어져 하늘의 빛이 나를 통해 흘러 나가도록 허용해야 한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며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고 나의 의식이 그리스도 의식으로 충만해 질 때까지 성장해야 한다. 나를 통해서 이 세상을 풍요하게 하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에 순명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