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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 우주의 생명나무

2010.01.20 08:30

물님 조회 수:2337

        인간 - 우주의 생명나무

요즈음 아바타라는 제목의 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로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이 단어는 인터넷 게임의 가상공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사이버 캐릭터의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바타라는 말이 컴퓨터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리처드 게리엇의 롤플레잉 게임 시리즈 울티마의 4편인 아바타의 임무(Quest of the Avatar)(1985)에서이다. 이 게임은 기존의 롤플레잉 게임의 선악구도를 폐기하고 메인 캐릭터의 미덕을 완성하는데 게임의 목적을 두었다. 게임을 클리어하게 되면 사용자의 캐릭터는 모든 미덕의 화신(아바타)로 새롭게 탄생한다. 따라서 이후 울티마 시리즈에서는 사용자가 조정하는 캐릭터는 이름 대신 아바타로 불리게 된다.

영화 ‘아바타’에서는 자기와 꼭같은 지적, 육체적, 감성적인 면과 뇌 능력을 가졌으나 몸이 다른 인간을 자신의 아바타라고 한다. 돈 되는 광물질을 얻기 위하여 최신 무기와 로봇, 첨단의 컴퓨터 기술을 동원한 전사들, 과학자들, 사업가들이 인간의 세계에서 나비 종족의 세계로 간다.

나비종족은 원시인으로 자연과 모든 생명체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서 만물 간에 어떤 에너지가 작용한다는 것을 믿는 종족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 인간과 자연간의 교감을 중시한다. 호위병 아바타는 처음에는 자신의 다리를 고칠 돈을 벌기 위하여 돈이 목적인 인간들에게 협조했지만, 점점 나비족과 교감하면서 나비족의 입장을 지지하게 되며 나비족의 신앙의 중심인 영혼의 나무를 베고 그 아래 묻힌 돈 되는 광물질을 얻기 위하여 나비족을 살상하려는 인간들에게 오히려 저항하여 싸운다.

이 영화는 돈을 밝히면서 인간을 위하여 다른 지구상 생명체를 아무 생각 없이 죽이는 인간을 악의 존재로 규정하고 순수한 영혼의 존재로서 자연과 우주만물과 교감하는 나비족을 선의 존재로 설정한다. 그 두 존재가 이 영화에서 대립구도를 이루고 갈등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나비족이 승리한다. 나비족은 인디안이이나 아프리카, 남미 아니면 다른 대륙의 원시인을 상기시킨다.

이 영화는 문명화된 인간은 물질을 얻기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지만 원시인이라 불리는 나비족은  자연과 더불어 교감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므로 앞으로 인간의 삶의 방향은 이런 쪽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바타는 장자와 성서의 세계를 현실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꿈을 꿀 때 꿈 속에서는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꿈 속의 현실이 현실이 된다. 그 세계 속에는 하늘을 나르는 거대한 새, 붕새가 살고 있다. . 붕새는 되어감의 과정을 거쳐 존재가 된 완성을 의미한다. 그 붕새와 하나가 된 세계는 평화의 세계요 이상세계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아바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이 지나가리니, 모든 것이 새로워지리라.” (고후 5:17)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함에 의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의해 살아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전제가 없이 단순히 “주여 주여”하는 식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은 하나의 씨알에서 생명의 새싹이 나오듯이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그 능력은 육적 본성의 에고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을 막으려 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질책을 받았다. 자기가 원하는 이기적 방식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려 하는 것은 악마의 길이다. 그것은 인격적인 악마이다. 그것은 믿음이 아닌 두려움을 바탕으로 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성격은 인류의 상처이다. 그것은 자기 부정과 자기 행동의 결과를 직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책임과 소명이 무엇인지 알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을 알거나 다스릴 수 없다.

인간은 한 알의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깨어나면 새들이 와서 깃들 수 있는 큰 생명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 (마태 13:31-32. 마가 4:31)  영화 속의 거대한 나무는 무한한 인간 생명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몸은 사고와 감정과 기억을 담는 그릇과 같다. 우주처럼 광활한 마음을 담을 수도 있고 에고의 놀이터가 될 수도 있다. 육체는 모든 것이 깃드는 곳이다. 육체가 없다면 운명도 사랑도 어떤 도전도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육체는 ‘나’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집이다. 몸은 스펀지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로 상징하는 가슴에너지인 감정(느낌)과 공기로 상징하는 의식과 자각을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상처란 육체가 아니라 가슴에서 일어난다. 누군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그냥 지나칠 때 뭉개진 감정으로 인해 상처 받는다. 그것은 인간적 에고일 뿐이다. 상처 받은 감정은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에너지 배출의 통로이다. 평정심을 잃게 되고 화를 내거나 불쾌함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공간과 물질계에서 영혼의 시각을 잃지 않고 생명의 순수성을 잘 지키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갈 수 있도록 힘써 노력 해야만 한다. 영화 아바타에는 “나는 너를 본다 (I see You)"라는 말이 등장한다. 아바타란 아! 봤다라고 새겨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