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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의 눈을 뜬 사람

2015.09.27 08:01

물님 조회 수:683



  햇빛의 눈을 뜬 사람

         마가복음 8:22-26



마가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있어 마지막 사건을 맹인 치유 사건으로 적고 있다. 이제 예수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게 된다. 그 수난의 십자가 사건이 세 번 예고되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이 입성하기 직전에 다시 한번 맹인을 치유하셨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맹인 눈 뜬 사건을 가장 핵심적인 구원 사건으로 강조하고 있을까? 마가는 예수를 인간의 몸과 영혼을 함께 고치는 진정한 의사라고 말한다. 인간을 참된 존재로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는 분이라 말한다. 그러한 삶의 시작은 눈을 뜨는 데 있다.


예수께 고침을 받고 눈을 뜬 맹인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들어섰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한 맹인 상태에 있었음을 마가는 제자들의 눈이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까지 멀어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예수를 통해 우리가 받아야할 구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깨닫는 눈이 열리는 데 있다. 그 눈이 열려야 하나님과 인간과 이 세계를 둘러싼 신비를 깨닫게 된다.

        

눈이란 무엇인가?


뇌는 두꺼운 뼈 속에 있지만 뇌의 일부가 더듬이처럼 밖으로 길어진 것이 눈이다. 시신경도 눈 뒤쪽에 있는 망막세포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뇌에서 나온 12개의 뇌신경 중에 6개가 눈을 관장하고 있다. 바라보고, 눈동자를 움직이고, 눈꺼풀의 움직임과 감각 인식에 이르기까지 연관성이 깊다. 인간의 말과 행동과 생각의 68%는 시각정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뇌에서 보는 기능을 맡는 곳은 후두엽(뒤통수)의 끝부분이다. 이것은 눈이 사물을 보는 순간 시각중추까지 정보가 가려면 뇌 전체를 가로 질러 가야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뇌에 손상이 생기면 시야장애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두정엽을 다치면 아래 반쪽이 안보이고, 측두엽을 다치면 하늘 반쪽이 잘 안보이게 된다.


시신경이 눈에서 가장 먼 곳인 뒤통수에 자리한 것은 머리 앞쪽이 뒤쪽보다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뼈 8조각 중에 가장 단단하고 충격에 강한 뼈가 뒤통수 뼈이다. 두뇌의 놀라운 신비 가운데 하나는 후두엽의 좌측 부분에 새 발톱 모양의 고랑, 가장 깊숙한 곳에 중심을 보는 시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뇌가 심하게 손상되더라도 중심부 시력만은 보전시키려는 인체의 설계가 얼마나 오묘한지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눈은 인간의 블랙박스 또는 영혼의 지도라고 할 만큼 몸의 장기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눈은 두뇌와 똑같은 초기세포로 만들어져 있다. 홍채학이나 아이리딩(eye reading)은 눈과 몸의 상응관계, 재능, 재질, 개성, 습관, 감정의 흐름과 패턴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눈(홍채)은 신경조직에 가해진 충격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몸의 긴장과 부정적인 에너지가 어떻게 쌓여 있고 작동되고 있는지 알려 준다. 태아 또는 어린 시절 무의식 속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상처와 고통의 경험은 신경계에 많은 긴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긴장은 신경계의 통로를 막히게 하여 더 크고 본질적인 자유와 사랑을 찾아가는 인간의 여정에 장애로 작동될 수 있다.


눈은 얼굴가운데 가장 멋지고 소중한 기관이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 말도 있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도 한다. 이런 표현은 눈이 다른 인체 기관보다 중요하고, 상대방의 마음과 의식을 파악하고 교류하는 데 기여도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눈동자는 해부학적으로 단순한 물질이지만, 눈이라고 하는 창을 통하여 인간은 물질 너머의 차원에 있는 나와 너를 본다.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눈이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나에게 볼 수 있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보이는 대상이 없다면 눈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빛이 없다면 본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눈은 수정체에 사물의 상을 맺히게 할 뿐이지, 눈이 바라보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망막에 비추어진 피사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감지하는 것은 단지 자신에게 투영된 것과의 관계를 감지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소리를 듣는 귀나 냄새를 맡는 코도 눈의 원리와 마찬가지 시스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기와 소리와의 상응관계 속에서만 귀가 작동할 수 있다. 귀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므로 단지 눈으로만 보았다고 해서 보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었다고 해서 들은 것도 아니다. 귀와 눈이 함께 보고 들을 때, 귀와 눈이 하나로 통하는 세계가 열릴 때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세계가 아닌 내면의 세계에 더 깊이 접속하여 바라보기 위해서 때때로 눈을 감고 바라 볼 때가 있지 않은가.


인체의 오감은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몸의 감각기관이 아니라 오감을 통해서 바라보는 ‘나’이다. 그‘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몸을 통해서 ‘나’를 표현하고 경험하고 소통하고 성장한다. 몸 안에서 ‘나’는 순수한 빛의 에너지이며 존귀한 지성이자 영원한 생명력이다. ‘나’는 불이고, 물이고, 바람이며 소리이다. 열등하지도 않고 우월하지도 않은 진정한 존재로서 ‘나’자신일 뿐이다. 그

‘나’가 귀를 통해 보고 있고, 눈을 통해 듣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뇌에 입력된 정보의 기계적 반응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과 행동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의식권에서는 기분 나쁜 일이 발생했을 때 상대방이나 그 일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한다고 여기고 즉각적으로 화를 내거나 원망을 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를 기분 나쁘게 한 것이 아니라, 그 상대에 대한 나의 생각과 반응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자극과 반응이 동시에 작동하는 기계적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무엇이 좀 보이느냐?


본문의 맹인 치유는 바로 앞의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사건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의 치유는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어루만짐으로 이루어졌다. 예수는 손을 내밀어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다. 어는 누구도 맹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간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맹인을 동네 밖까지 데리고 나갈 필요성이 없다고 단정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맹인은 좁은 사고와 활동에 갇혀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한 번도 자기 공간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맹인과 같다. 자기 자신도, 세상도, 자연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이야말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다.


맹인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에 대해 공격적이고 또한 방어적인 행태를 보인다.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사람은 그렇게 보고 그렇게 행동하게 되어 있다. 삶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예수는 자기 안에 갇혀 밖을 향한 눈을 감은 맹인의 손을 잡고 둘 만의 특별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가셨다. 도살장 옆에서 명상하지 않는 것처럼 치유의 기적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맹인이 눈을 뜬 사건은 신뢰의 보호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예수는 맹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셨다. 그것은 맹인을 향한 자비의 표현이었다. 아이에게 침을 발라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도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른 후 맹인에게 물으셨다. " 무엇이 좀 보이느냐?" (23절) 그 때 맹인은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 데 걸어 다니는 걸 보아하니 사람들인가 봅니다" (24절) 하고 대답하였다. 맹인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아 눈이 침침한 상태였다. 보기는 보는 데 또렷하게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볼 수 있지만 얼굴을 보지는 못하는 상태이다.

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서울의 지하철을 생각했다. 만삭의 여인이 힘겹게 서있건만 노약자 석에 눈 감고 앉아있는 젊은 녀석들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나무쯤으로 보고 있을 거라고 ---. 자신 앞에 서있는 여인과 노인의 얼굴을 그가 볼 수 있었다면 그렇게 뻔뻔하게 앉아 있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다시 맹인의 눈에 손을 얹으시고 그를 완전히 치유하셨다. 그러자 그의 눈이 밝아져 햇빛아래서 보는 것처럼 똑똑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본문의 뜻은 '자세히 응시하면서 주의 깊게 계속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맹인의 깜감한 시력을 단계적으로 회복시켜 주었다. 맹인은 그냥 보는 사람, 바라보는 대상의 외양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적인 진실까지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제대로 보고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두 번째 손을 얹어 주셨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마가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어떤 시력의 눈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살펴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의 고독과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그 일은 그 분의 손길이 내 두 눈을 덮을 때 일어나는 은혜의 사건이다.


삶은 눈을 뜬 자에게만 존재한다.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문제이지만 모든 이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삶이란 눈을 뜬 자에게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눈을 뜬 다는 것은 깨어나는 것이요 믿음과 진실의 세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사람들은 맹인처럼 깜깜하게 보거나 움직이는 나무 정도로 사람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교우 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형편이다. 똑똑히 바라본 다는 것은 만남을 불러일으키는 바라봄이다. 데카그램 수련에서 바라봄과 되어 봄의 수련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 눈으로 모든 대상을 제대로 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분야이든지 눈을 뜨기 위해서는 칠흑 같은 어둠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앙의 단계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지난 주 카톡에 올라 온 진달래 순례길 소식에는 누리장나무와 꾸지뽕을 본 이야기와 사진이 있었는데 그것은 주일 아침 마다 예배당에 걸어서 올라온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축복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보는 것은 시력만이 아니라 속도와 비례한다. 달려가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놓치는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시력은 깜깜한 밤의 시력도 있고 별빛의 시력, 달의 시력, 햇빛의 시력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시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하겠는가.

2015.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