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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은 악마의 나라조차 망하게 한다

       마가복음 3: 20-36


빛이 나타나면 어둠의 세력은 저항을 하기 마련이다. 거짓이 상습화된 곳에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는 공격을 당하게 된다. 거짓말하는 집단에게 위험한 것은 진실한 자의 입과 행동이다. 가장 본질적인 (radical) 것은 가장 위험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들은 어느 시대이든지 자신들의 틀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양한 틀을 구축하여 물샐틈없는 방어력을 행사해왔다. 그들은 법과 제도를 이용하기도 하고 종교적 이단 논쟁을 통하여 사람을 잡아 죽이기도 한다.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는 행동이나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고 밥을 먹는다든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는 등의 가르침은 당대의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나 전통에 찌들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머리속에서 쥐가 나는 일이었다. 급기야 바리새인들은 물론 가족 친척들 까지 일제히 예수를 공격하고 나서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논쟁을 하다가 화가 극도에 오르게 되면 하는 욕설이 ‘ 미친 X'이라는 말이다. 공격과 방어의 끝은 상대를 정신 이상자로 단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다는 극단적 상황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이 서 있었음을 본문이 보여 주고 있다.


예수의 가족과 친척들은 자신들의 가문에 큰 누가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예수의 행동과 말은 모두 그들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기 때문에 강제로 예수를 끌고 가기 위해 나서게 되었다.


“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어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21)”


미친 사람으로 단정하고 나면 상대의 말은 완벽하게 묵살되게 된다. 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던 그것은 모두 미친 짓이다. 친척들은 미쳤다고 했고 바리새인들은 마귀 두목 바알세블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내는 것으로 비하했다. 바알세블이란 ‘집의 주인’ 곧 마귀의 집을 다스리는 두목을 뜻한다. 예수는 자신을 마귀들린 자로 보는 공격에 대해 이런 비유로 반박하셨다.


“사단이 어떻게 사단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갈라져 서로 싸우면 그 나라는 무너져 버린다. 한 가정이 불화하여 갈라지면 그 가정은 망하고 만다. 만일 사단이 사단과 싸운다면 어떤 결과가 이어나겠는가? 사단의 나라는 서지 못하고 망해 버리지 않겠느냐? ” (23-26)


바리새인들의 공격과 단정은 의심의 산물일 뿐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억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예수는 지적하고 있다. 악의에 찬 사람의 눈에는 진실이 보일 수 없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우리가 이 시대에 새겨야 할 깊은 진리가 담겨있다. 마귀의 세계이건 하나의 가정에서건 일관되게 통하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자기편끼리 싸우면 망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마가는 이 사건의 기록을 통해서 교회가 처할 수 있는 분열의 위험성을 경고해 주고 있다. 요즈음 중요 이슈가 되고 있는 총선에서 야당이 보여주는 분열의 모습 또한 우리 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리사욕에 눈 멀어 있으면서 국민을 위한다고 목청 높이는 모습 또한 애처롭다.


분열의 씨앗은 의심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고 단정하고 공격할 때 분열은 시작된다. 교회가 복음의 힘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은 모두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분열의 모습 때문이 아닌가. 돌아보면 나의 어린 시절 교회의 모습은 교단의 분열로 잃어나는 온갖 작태였다. 초등학교 시절 장로님과의 몸싸움 끝에 강단에서 양복의 팔이 떨어져 나간 옷을 입고 계시던 목사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그 때 일이 떠오를 때마다 진리문제와 생사가 걸린 일이 아니라면 교회 안에서 싸우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곤 해왔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시에 이런 시가 있다.


하와를 유혹한 뱀 때문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다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고

우리는 형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뱀을 잡아 죽이자고

이 세상을 서럽게 만든 원수

뱀들을 잡아 죽이자고

우리는 논두렁과 야산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전쟁 포로를 잡듯이

제법 큰 뱀 한 마리를 잡아

전신주 옆에 매달아 화형식을 거행했다.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그러나 말 못하는 뱀은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뱀은 무어라고 항변하며

죽어 갔을까.

뱀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원망과 탓의 비빔밥을 먹어대며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서

뱀을 향한 돌팔매질부터 배운

어린 날의 예배당

내 유년의 가르침은 그래서 슬프다.


- 내 유년의 가르침은-


‘예수는 자신을 향하여 미쳤다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양심과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골몰했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외치는 양심과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성령의 하시는 일을 떼 지어 날조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함부로 공격하는 태도는 자신을 영원히 죽이는 영적 자살행위일 수밖에 없다. 성령을 의도적으로 악마로 둔갑시키는 악의적 행동이야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악이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일어나는 자범죄와는 차원이 다른 죄이다.


   예수를 붙잡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예수를 붙잡아 가려고 찾아왔다. 그들은 집 밖에서 사람을 시켜 불러내었으나 예수는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찾고 있다는 전갈을 듣고 이렇게 말씀했다.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 (33,35)


교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무엇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에 의해 탄생했다. 교회는 친목단체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한 공동체이다. 피어린 순교의 피가 뿌려지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까지,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는 가족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깊은 헌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교회는 항상 위기를 겪어 왔다. 그것은 예수의 가족들처럼 공동체의 신뢰와 결속을 앞장서서 깨는 사람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시대 때 신사참배의 문제를 놓고,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데 앞장섰던 거와 같을 것이다. 요즘도 교파와 교리를 두고 교회를 어렵게 하는 일들이 비일 비재한 것을 보면 예수의 하시는 일을 악마의 일로 매도한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교회의 적은 바리새인들처럼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내 어머니와 피를 나눈 형제들처럼 가까이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성장과 성숙의 단계를 건너가기 위해 바로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결단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우리는 예수를 나도 모르게 내 생각 속에 가두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 생각과 뜻에 벗어나면 즉각적으로 기분 나빠하고 공격적 언사를 사용하는 영적 미숙함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내 생각의 한계와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 늘 새롭게 나를 향해 찾아오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입력된 생각으로 그 뜻을 헤아리는 타성을 버리고 늘 새롭게 묻고 듣고 실천하는 지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