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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나는 그리스도의 눈

2014.12.23 07:33

물님 조회 수:671

 

 

기적 - 나는 그리스도의 눈

기적은 모든 이들이 막다른 상황에 처하게 될 때 꿈꾸는 주제이다. 중병에 걸렸거나 경제적 위기 등 절망에 처할 때 기적을 바라는 것은 보편적인 인지상정일 것이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기적, 귀신축출, 병치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기자들이 예수의 기적이 성도들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고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 전통에는 육체적 질병과 관련된 이적과 치유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왔다. 그런데 복음서보다 이전에 기록된 바울서신에는 예수님의 기적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광야애서 40일 금식후에 있었던 사탄의 시험은 기적과 관련된 시험이었다. 분명한 것은 기적을 보여주기를 원하는 시험을 예수는 거부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할 때 나병환자의 병을 고쳐 주시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셨다.

 

수많은 군중이 다 보아서 알고 있는 기적에 대하여 굳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마8:4)고 하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에 환호했을 뿐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선교 초기에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후기에 갈수록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기적이 강조될수록 복음이 감추어진다는 점을 통찰했다. 기적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예수에게 다가서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화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던 그 시대에, 예수에 대해서 각종 신화를 만들고 그 신화로 메시야로 믿을만한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했을 때, 그는 이미 예수에 대하여 비신화화를 했다. 그러면서 예수가 자기 자신에게 왜 그리스도이신가를 증언했다. 바울은 예수께서 기적행하심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아니라 악의 괴수와 같은 자신을 사도로 부르신 은총이 증거였다고 고백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나가 된 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강조한다. 온갖 율법의 틀에 매여 자신과 타인들을 율법의 칼로 난도질 하던 사울이 사랑과 은혜의 사람, 바울로 거듭난 것이야말로 기적이었던 것이다. 얼음 같이 냉냉한 내 가슴에 하늘의 자비가 흘러들고 세상을 향해 흘러나가는 삶이 된 것을 경험한 바울은 진정한 기적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일어났는가를 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어거스틴은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보다도 보리 싹 하나가 싹이 터서 날마다 자라는 신비가 더욱 큰 법’이라고 통찰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고 여러분들이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신비이고 기적이 아닌가.

 

나는 ‘되어보기’가 가장 심오한 신비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한 송이 들꽃을 바라보며 그 꽃과 하나가 되는 경험, 그 꽃의 로고스를 깨닫는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안의 빛과, 그 존재의 빛이 만나는 경험이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들,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그 속에 감추어진 빛을 찾아내는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다.

 

우주의 95%는 깜깜한 어둠 속에 감춰져 있다. 인간 역시 95%는 무의식 속에 그 존재의 비밀이 숨겨 있다. 과학자들이 우주의 신비를 풀기 위해 우주선을 보내는 것처럼 나 역시 내 안에 있는 무의식의 영역들을 탐사해가고 있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것은 내 눈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영혼이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마음이 몸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무한 우주 같은 나를 찾아가는 중요한 출발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원하고 찾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종착점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그 목표를 향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목표를 찾기 전에 출발 지점부터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시작을 놓치고 결과만을 바라보고 달음박질할 때 삶의 혼란이 일어나게 된다.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은 기적의 결과만을 애타게 원할 뿐 그 기적을 원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정작 모르고 있고 관심조차 없다. 시작을 모르는 사람이 결과만을 찾고 있는 형국이다. 시작이 있을 때 끝이 있다. 모든 시작은 나에게서 시작하고 나에게서 끝이 난다. 나 없는 시작 없고 나없는 끝도 없다. 그런데 나없는, 나가 빠진 결과만을 원하고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 우주에는 죽음이 없다. 하나님은 죽음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이 사실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죽음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두려움의 실체는 없지만 온갖 두려움의 가상현실 속에서 부대끼는 인간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의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을 찾고 있다. 병이 들면 병을 낫게 하는 하나님, 증권을 사게 되면 주식을 올려주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런 류의 기적을 예수에게서 찾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피를 토하듯 예수는 요나의 기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물고기 뱃 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난 요나의 기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는 요나처럼 십자가라는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갔다 나오셨지만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기적을 부르짖고 있다. 이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무엇인가. 내가 다급하게 될 때만 찾는 하나님, 나의 막다른 현실에 해결사가 될 그리스도를 꿈꾸고 있다. 그런 의식이야말로 나를 삼키는 요나의 물고기이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기적을 내려놓아야 심령이 새로워지는 기적을 볼 수 있다.

 

고은 시인의 ‘그 꽃’ “ 내려 갈 때 보았네. 올라 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시가 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산하면서 그 꽃이 바로 자기 자신이고 눈송이로 피어난 설화임을 발견한다면 기적은 나타난 것이다. 내가 기적이다. 하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의 삶이 기적이다. 이 겨울 산천이, 지구의 운행이, 우주가 기적이다. 우리는 기적을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다.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태어나는 성탄을 맞이해보자. 선물을 주고받기 전에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성탄을 준비하자. 나라는 구유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빛이 지구에 찾아든 날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내 어둠 속에 찾아와야 나의 성탄이 된다. 성탄의 빛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성탄은 그대 안의 내 면에서 그리스도 의식으로 그대가 바라보는 대상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진정한 기적은 내 어둠이 걷혀지는 빛을 만나는 것이다. 그 빛으로 내 안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눈이다. 예수는 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시고 있다. 바로 그 눈을 뜨는 것이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