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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 -밤에 찾아 온 사람

2016.04.20 04:22

물님 조회 수:855


니고데모 -밤에 찾아 온  사람

   요한 복음 3:1- 8

 

기적과 병 고침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과 예수의 말씀과 가슴에 공감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 기적을 보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예수는 믿지 않았다. 그들의 환호는 언제 돌팔매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를 믿고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정작 예수는 나를 믿고 있지 않다면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기적을 보고, 또는 천당을 간다는 목적 때문에 예수를 수단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 초점이 예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3장은 기적을 보고 예수에 접금한 사람들이 소개 되고 있는 데 첫 번 째 등장하는 인물이 유명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유대의 지도자이자 바리사이인이었다. 산헤드린 의회 의원이며 예수의 시신에 바르고자 몰약과 침향으로 만든 방부제를 100근 가량이나 가져올 만큼 부자였다. (19:39) 예수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학자)이라고 불렀다. 그는 자신이 예수를 만난 사실을 감추기 위해 비밀리에 예수를 밤에 찾아 왔다. 한 사람의 모습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는 이 본문에서는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후에 공개적으로 예수를 옹호하고 (7:50)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예수를 장사지냈다. (19:30) 니고데모는 자기 생각의 어둠, 곧 예수의 어떤 것들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빛의 믿음으로 거듭 난 사람이었다.

  

대화의 엇갈림


인간은 자신의 의식 수준만큼 바라보고 말하고 표현한다. 그것은 인간관께 속에서 언어의 혼선이 일어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니고데모는 예수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사전적 의미로 예수의 시적 언어를 해석하려고 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 누구든지 새롭게 다시 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 (3절)


여기에서 다시라고 번역된 말은 ‘아노텐’이다. 이 단어는 ‘위로부터’라는 뜻도 있다. 예수는 ‘위로부터 ’온 존재이다. (1:11) 인간은 땅에서 낳아서 땅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이 둘의 차이가 인간의 삶과 의식을 가르마질 한다. 이 의식의 변화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부연하여 설명하셨다. (5절)


요한복음은 구원의 상징으로 물을 많이 등장시키고 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 의식 (1:26)

물을 포도주로 (2:9 )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 (4 :14)

연못물로 치유하심 ( 5:7)

물 위를 걸으심 ( 6:19)

목 마른 자에게 물을 (7:37)

물을 치유에 사용 (9:7)

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 13:5 )


물은 깨끗하게 하고 치유의 물질로 또는 다시 태어남의 종교적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다. 액체 고체 기체를 넘나드는 자유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노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종교적 의식으로써 물을 사용해왔다. 지금은 약식으로 머리에 물을 얹는 것으로 대치하지만 본래 세례는 강에서 시행해왔다. 지금도 러시아 정교회는 겨울에도 강에서 세례의식을 행하고 있다. 강물 속에 들어 잠기는 것은 숨을 쉬지 못하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 과거는 흘러가고 새로운 탄생의 존재로 거듭나는 의미를 교회는 세례 의식 속에 표현해왔다.


요한복음은 물과 포도주, 빵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것들이 가장 종교적인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혼이란 물질적 또는 육체적인 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식당 밥과 어머니의 밥과의 차이는 정성과 영혼이 깃든 밥이냐 여부의 차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담아 정성을 다할 때 물질이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법이다. 돈도 자신을 망치는 타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만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도 사용할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물질과 몸을 영적인 것으로 초월시킬 책임이 있다. 이 자각이 없을 때 인간 의식은 물질에 갇히게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무한한 존엄성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데 있다. 땅 속에 있던 씨았이 움이 터 밖으로 나오듯이, 알이 깨어져 그 속에서 새가 나오듯이 인간도 땅의 의식으로부터 자기 초월의 하늘 의식으로 깨어나야만 한다.


11절 이후에 니고데모는 사라진다. 그 이후에는 단수 너가 복수 대명사 너희 또는 우리라는 단어로 대치되고 있다. 요한복음의 원본은 마침표가 없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 해설인지 예수의 말씀인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 11절 이하는) 저자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 인류 전체에게 전하고자 하는 복음의 소식으로서의 증언이라는 점이다.

    

불뱀과 구리뱀 - 구원의 상징


13절 이하에는 구약의 사건들이 등장하고 있다. 민수기 21장 4-9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 불만하다가 불뱀에 물려죽는 재앙이 등장한다. 그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구리뱀을 만들어 세웠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치료가 되었다. (민수 21:9) 세월이 흐른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었다. 히스기야왕은 종교개혁을 하면서 구리뱀을 없애 버렸다. (열왕기하 18장)

지금은 요르단 땅의 느보산에 가면 커다란 구리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모세는 느보산에서 노예집단을 이끌던 지도자의 생을 무덤 하나 남기지 않고 마감했다. 나는 그곳에서 한 많은 모세의 가슴을 느껴 보았다.


노예들에게 자유를 말한다는 것은

노예들을 이끌어 자유인의 길을 걷게 한다는 것은

간이 썩고 쓸개가 녹아내린다는 것을

느보산은 말해주고 있다.

결국은 자기 자신조차 들어가지 못한

젖과 꿀의 땅을 바라만 보다가

숨을 거둔 모세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산을 올랐을까

자기 자신만의 자유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자유를 꿈꾸는 자의 비극을

나는 느보산의 찬바람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몸을 벗어야할 자리와

시간을 알았던 모세는

무덤조차 남기지 않았다.

철없는 민중들의 통곡소리 속에

무덤을 만들었을 뿐

이 땅에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쟈유를 위한 투쟁의 길,

40년을 걸어도 끝나지 않았던 

모세의 길은 오늘

나에게 이어지고 있다.

불평으로 날을 새던 인간들을

물어뜯던 불뱀이

구리뱀으로 변하여

오늘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 느보산에서 -


광야시대의 구리뱀 사건은 훗날 구원의 상징으로 해석되었다. 저자는 들어올리다는 뜻의 ‘휘소’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이 땅에만 시선을 두고 있는 나의 의식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첩경이라는 해석이다. 유한한 시간의 차원에 매인 내가 영원의 세계로 들어 올려지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들어 올려진 예수를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그 분이 목숨을 던져 전해 주고자 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던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올려다볼 대상이 없을 때 우리의 시선은 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나를 치유하는 방법과 생명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보아야 한다.

 

“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사람들 위에 쳐든 것 같이 인자도 나무 위에 높이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3: 14-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