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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경험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송현(시인. 무향선원 대표) 

 

 

1.

순진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으면 다 되는 줄 알고, 책 많이 읽으면 장땡인 줄 안다. 이런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도사가 되고,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뭐가 슬슬 풀리는 줄 안다. 증말 웃기는 짜장같은 순진한 생각이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책을 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인류가 살아온 발자국들을 보면 책을 많이 읽은 인간들이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인간들 보다 더 교활하고 더 거짓말을 많이 하고 더 뻥을 많이 치고 더 사기를 많이 쳤다. 그리고 자기 변명을 더 잘하고, 자기 합리화를 더 잘하고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더 잘 뒤집어 씌우곤 했다. 그렇다면 책을 많이 읽은게 무슨 자랑이며 무슨 대단한 벼슬이라도 된단 말인가!

 

2.

순진한 또 다른 사람들은 책은 안 읽어도 경험을 많이 하면 다 되는 줄 알고, 경험을 많이 하면 장땡이 인줄 안다. 이런 사람들은 경험을 많이 하면 도사가 되고 경험을 많이 하기만 하면 엔간한 일들은 슬슬 풀리는 줄 안다. 증말 웃기는 짜장 같은 순진한 생각이다.

 

물론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은 경험을 적게 하는 것 보다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인류가 살아온 발자국들을 보면 경험을 많이 한 인간은 경험을 적게 한 인간들보다 더 교활하고 더 거짓말을 많이 하고 더 뻥을 많이 치고 더 사기를 많이 쳤다. 그리고 자기 변명을 더 잘하고, 자기 합리화를 더 잘하고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더 잘 뒤집어 씌우곤 했다. 그렇다면 경험 많이 한 것이 무슨 자랑이며 무슨 벼슬이라도 된단 말인가!

 

3.

얼마 전에 참 교활하고 음흉한  대학교수란 자가 선거판에 얼쩡대면서 독서를 많이 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을 보고 "어찌 저딴 물건이 대학 교수씩이나 할까""하고 혀를 차며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가 독서를 많이 한 것은 대부분 "어릴 때 한 독서"라고 했다. 그런데 독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나 독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이단 소리를 들으면 아무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지 싶다.

 

그런데 사실 독서란 어릴 때 많이 하는 것이 아예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지 몰라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어릴 때 독서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 애는 이빨이 약해서 아무 것이나 마구 씹어 먹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중요하다.! 단순히 책을 읽기만 하는 독서는 많이 해봐야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이런 말이 있다.

 

--논어를 읽어도 논어를 모른다!

 

참 멋진 말이다. 논어를 읽는다고 논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란 사실이다. 논어를 골백번 읽는다고 해서 논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논어를 줄줄 왼다고 해서 논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논어를 몇번 읽고 안 읽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논어를 읽느냐가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논어를 이해할 수준이 되는 사람이 논어를 읽는 것과 논어를 이해할 수준이 안되는 사람이 논어를 읽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마침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분명 있기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극히 제한된 범위에 속하는 문제이다. 가령, 길을 안내한 책이라면 여러번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하고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고 난해한 철학서적 따위를 여러번 반복해서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싸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이해하려면 그 책을 반복해서 읽어서 될 일이 아니다! 싸르트르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하고, 실존주의가 뭐하는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관한 예비지식이 있어야 존재와 무를 읽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한국 불교에가 가장 코메디라면 코메디요 가관이라면 가관인 것은 초등학교도 안 나온 할머니들에게 반야심경을 가르치고 외게 하는 일이다. 이는 증말 가관이고 개가 웃고 소가 웃을 넌센스이다. 사실 붓다는 반야심경을 진작 설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할만한 제자나 청중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설하지 않고 자그마치 이십년간을 참고 기다렸다. 이십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반야심경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사리불이다. 사리불은 당대의 최고 석학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이십년을 참고 기다려온 반야심경을 사리불에게 설하였다.

 

6.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반야심경은 경전의 에뻬레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말로 설할 수 있는 경전 중에서 가장 최고봉에 해당하는 경전이다. 산으로 치면 에베레스트 봉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이 대목에 큰 혼란과 심각한 문제을 안고 있다. 에베레스트봉은 아무나 가는 데도 아니고 아무나 갈 필요도 없는 곳이다. 그리고 거기는 아무나 갈려고 해도 쉽사리 갈수가 없는 험한 곳이다. 너무 높고 너무 험준해서 아무나 못 가는 곳이다.

 

보통 사람은 일생동안 에베레스트에 가지 않아도 되고 거기 못간 것이 아무런 흉도 아니고 아무 잘못도 아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이 바로 경전의 에베레스트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도 어중이 떠중이나 다 공부해야 할 경전이 아니다. 어중이 떠중이가 공부 하겠다는 것이야 말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를 어중이 떠중이가 못가는 것처럼 반야심경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7.

한국 불교에서는 절간마다 법회마다 반야심경을 외고 공부를 한다고 한다. 이는 마치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을 모아놓고 에베레스트 등반대를 모집하는 것과 같고,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해서 매번 공부하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어린이집 얼라들에게 인수분해나 삼각함수를 가르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지 싶다. 분명한 것은 어린이집 얼라들은 인수분해나 삼각 함수 따위를 몰라도 되고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얼라들에게 삼각함수를 가르치고 인수분해를 가르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어린이집에 우리의 귀한 어린이를 보내야 할까?  

 

이처럼 보통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굳이 에베레스트봉에 가지 않아도 된다. 산을 알려면 지리산을 가도 되고, 설악산을 가도 된다. 아니면 한라산을 가도 되고 무등산을 가도 된다. 그도 저도 아니면 동네 뒷산을 가도 된다.

 

8.

경험을 만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역시 경험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 경험을 하느냐의 문제이다.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경험을 할 경우는 그 경험을 통해서 배울 것이 많이 생기지만 그 경험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사람이 경험을 할 경우에는 그 경험을 통해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

 

배우는 것도 경험을 많이 한다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마치 논어를 많이 읽는다고 논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경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경험에서 귀한 의미를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경험을 통해서 그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깨달을 수 없는 자에게 경험은 단순히 그를 꾼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이는 마치 보통 사람이 노름을 많이 하여 마침내 노름꾼이 되는 것과 같다. 노름꾼에게는 자신의 노름 경험이 그리 중요한 의미를 주지 못한 경우이다. 노름꾼은 경험을 통해서 귀한 가치를 발견하지도 못한 것이고, 경혐을 통해서 귀한 지혜를 발견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9.

불자들이 그 어려운 경전을 반복해서 읽고 암송하는 것을 말릴 것까지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반복해서 읽고 외우는 것이 그 경전을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착각한다는 사실이다. 이해한 것과 이해한 것으로 착각한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차원이다. 착각은 오해의 결과이다. 착각을 하는 데는 얼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그것을 보는 눈이 시원찮아서 잘못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을 듣는 귀가 시원찮아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것을 이해할 수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수준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오페라 지휘하는 것을 보고 "저 아저씨가 저 여자를 왜 때려요?" 하는 식이다)

넷째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실력이 없어서 횡설수설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

다섯째 그것을 설명하는 사람이 실력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잘 이해를 못하고 남에게 설명을 엉터리로 하였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착각을 한 사람은 자기가 착각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올바로 이해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과 같다. 어린 아이가 손가락을 쬐끔 다쳤을 때 어머니가 살살 만져주면서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하면서 "호오" 해주면 금세 안 아픈 것과 같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 최면현상이라 할 수 있다. 불자들이 어려운 경전을 이해한 것과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0.

일찌기 시인 예이츠가 말했다.

 

--사람은 경험이나 독서의 양에 비례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독서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해서 현명해지고 경험을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해서 현명해지는 것이다.

 

이 말의 핵심은 어중이 떠중이가 독서를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어중이 떠중이가 경험을 많이 한다고 장땡이가 아니란 말이다.(2013.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