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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가미가제 독고다이」 중에서 

 
 
 
 
  나는 단번에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 좀 아슬아슬했다. 내가 아무리 그녀를 사랑하다 못해 숭배한다고 해도 그녀의 날카롭고 잔인한 말에 그간 쌓인 감정이 폭발해 나도 모르게 울컥할 뻔했다. 그런데 뜻밖으로 깨달은 것은 아무러한 정신적 사랑이라도 어쨌거나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머리로는 당장이라도 이딴 말도 안 되는 외짝사랑 놀음 따윈 집어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런 선머슴같이 뻣센 ‘주의자’ 계집애 따위는 줘도 안먹겠다고 비양하는데, 몸이 따르지 않았다. 온몸이 온몸으로 적나라하게 저항했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꼬르륵대던 빈속의 허기가 순식간에 까마아득히 가셔버린 것이었다.
  이토록 어이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현옥의 황홀한 신경질과 감미로운 타박을 된통 뒤집어썼다. 현옥에게 귀동냥한 바로는 제네바인가 어딘가에서 합의한 국제 조약에 전쟁 중의 적군 포로라도 자국의 장병들과 다름없이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그것을 위반하고 마음대로 포로를 학대하고 고문하고 죽인다고, 현옥은 관자놀이에 핏대까지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현옥은 정작 자신의 눈앞에 얼마나 애처롭고 불쌍한 포로가 붙잡혀 있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깊은 한숨에 학대 받고 짧은 미소에 고문당하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한 뜨거운 눈빛에 살해되었다.
 
  (중략)
 
  인력거를 잡아타고 시내로 나오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은 채 각자 차양 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쟁이 전 세계를 뒤흔드는 판국에도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나치의 고동색 셔츠, 파시스트의 검은색 셔츠, 일본군의 담녹색 군복으로도 자연의 분홍과 연둣빛의 향연을 가릴 수는 없었다. 꽃과 새잎을 보노라니 마음이 조금 흐너졌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한 지붕을 들쓰고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비록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와 함께 있는 순간 내 마음은 봄이었다.
 
 
  작가_ 김별아 - 1969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3년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등단. 장편소설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개인적 체험』, 『미실』, 『채홍』 등과 소설집 『꿈의 부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