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279421
  • Today : 764
  • Yesterday : 771


 

 

                                       간 병 일 기 Ⅲ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의수(전북대교수·철학과)



2003. 09. 09

새벽3시에 아내의 앓는 소리에 눈을 떴다. 소변을 보겠냐고 물었더니 대변이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나오고 있단다. 옷에다 누라고 했다. 이틀 전 입원 후 5일만에 관장을 통해 한 덩이 누었던 것만큼 나왔다. 옷을 벗기고 나니 깔개에다 그만큼을 더 누었다. 잘 닦아주고 기저귀를 채워주었다. 그런데 한 숨을 자고 나서 보니 다시 갈아야 할 만큼 많이 누었다. 그러니까 아내는 연이어 세 번이나 대변을 본 것이다. 그런데 또 똥을 누겠단다. 이번에는 그 세 번을 합친 것만큼 누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관장약을 투입한 모양이다.


똥.

평상시에 그건 더러운 것이다. 냄새가 지독하고(방귀도), 똥을 보거나 더구나 밟으면 몇 일을 두고 더럽고 께름칙하다. 그런데 결혼하여 아기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기의 똥이 건강한 상태인지, 탈이 난 상태인지만 중요해진다. 냄새가 지독한 것은 똑같아도, 그것은 관찰의 대상이지 기피의 대상은 아니다. 말기 암 환자인 아내의 경우도 똑같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하고 예민하며 자존심이 강한 아내는 지독한 방귀를 뀌면서 매번 방귀가 나온다고 말을 한다. 미안하다는 표정과 피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나는 ‘방귀든 똥이든 나오는 것이 좋은 일이다. 가스건 변이건 안 나오고 막히는 것이 문제지, 나오면 좋은 일’이라고 말해준다. 오늘 새벽의 용변은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입원하면서부터 하루 3000cc씩 보던 소변이 어제 낮부터 딱 끊어져 배가 부풀어올라서 나는 크게 걱정했었다. 간호사들이 카타타를 넣어 소변을 빼자고 여러 차례 설득해도 아내는 싫다고, 괜찮다고 거절했었다. 삽입시 통증이나 불쾌한 느낌을 도저히 못 견디겠단다. 너무도 고집을 부려서 마지막으로 밤11시에 주치의가 왔을 때 밤새 기다려 본 후 그래도 안 나오면 오늘 아침에 카타타로 하자고 약속을 받아 놓았다. 그런데 이렇게 새벽에 대변을 푸짐하게 본 것이다. 아내는 처음에 소변도 함께 보았다고 말한다. 내가 제대로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대변과 함께 배설된 액체만도 상당했다. 중간에 끝도 없이 변이 나오고, 아내는 완전히 지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환자들이 운명하기 앞서 배냇똥을 눈다는 말이 생각나 이렇게 빨리 오는가 걱정되기도 했다.

 

어제 처형은 서울로 올라갔다. 추석을 쇠러 간 것이다. 떠나기 직전에 아내는 엄청난 복통에 시달렸다. 처형은 또다시 눈물바람을 하며 떠나갔다. 오늘은 전화해서 다시 안심시켜 드려야겠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한 후에 나는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좀 했다. 박길환 선생은 꼭 내려오겠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그 대신 장례식 때는 꼭 알리기로 약속했다. 내 친구 김승기와 세인엄마는 추석 후에 연락을 하기로 했다. 독일 이해룡씨에게서 메일이 와서 답을 해 주었다. 아내 주변의 사람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아내를 끔찍이 걱정한다. 아내의 장례도 그렇게 사랑과 기원 속에 치러질 것이다.

나의 죽음은 어떻게 될까? 나는 언제 어떻게 떠날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흔적을 남기지 말고 자연에 흩뿌리라고 말할 것이다. 수많은 가루가 되어 지구의 곳곳으로 날아가고, 떠내려가고 싶다. 우주 속으로도 날아가고 싶다. 가서 무엇을 보거나 어디를 차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냥 자연의 일부, 우주의 작디작은 일부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2003. 09. 11

오늘이 추석이었다. 지나간 3일은 너무도 길었다. 이틀 전(9일) 새벽 아내의 똥을 치우고(1시간 30분 동안) 잠이 오지 않아 일기를 썼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다. 임교수가 회진 와서 무슨 약을 끊으라고 한다. 그 전에 이미 혈압이 낮아 이뇨제를 당분간 놓지 않겠다고 했었다. 환자의 상태에 변화가 있는지, 약을 다르게 쓰려는지 자세히 설명을 듣기 위해 주치의 면담을 요청했다. 문제는 혈압이라고 했다. 70-40인 혈압이 한번 더 떨어지면 운명하게 된단다. 그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단다. 연휴는 넘기겠느냐니깐 그것도 모른단다. 어쨌든 만날 사람들은 연휴기간에 다녀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단다. 혈액주사를 놓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생명을 꼭 연장시켜준다고 장담할 수는 없단다. 임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임교수의 말은 한 발 더 나간다. 오늘(9일)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란다.

 

아내는 그 전날, 즉 처형이 서울로 올라갈 때 엄청난 통증 때문에 진통제 주사를 따로 맞은 후 내내 잠을 많이 잤다. 새벽에 똥을 많이 누고 나서는 호흡 간격이 아주 많이 길어졌다. 간호사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9일)이 고비가 될 것 같단다. 주치의도 마찬가지다. 혹 고비를 넘겨도 며칠 가기 힘들 것 같단다. 나는 이강실 목사께 전화하여 장례 문제를 의논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후에 이목사님이 전주여성의 전화 박민자 대표, 여연 조선희 사무처장과 함께 왔다. “여성장”으로 하기로 결정했단다. 사양했다. 아내가 부담스러워 할 일이다. 내가 보기에도 좀 무리한 일이다. 아내의 경우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다면 앞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을 그만큼 대우해야 형평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사양하고 만류했다. 더구나 추석 연휴에 주부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장례 행사에 매달린다는 것은 너무 큰 부담이다. 이 모든 일들을 얘기하며 사양했으나 고집들을 꺾지 않는다. 받아들였다. 나는 신세만 지고 나중 일은 잘 챙기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강실목사님은 전북여성단체 연합 대표로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로 일하고 있고, 내 아내 함경숙님은 전주여성의 전화 창립멤버로 시작하여 상담원, 사무국장,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여성의전화 조직위원, 전북여성단체연합 성과인권위원장을 지냈다.)

 

이분들과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학과 조교와 대학원생들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준비를 부탁했다. 알고 보니 전북대 장례식장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해결된다고 한다. 다행이다. 모든 복잡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풀린 셈이다. 거기에 여성장까지 보태졌으니, 이제 아내의 장례식은 해결할 과제가 너무 많은 힘든 대사(大事)가 아니라,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도 영광스럽고 또 준비된 대로 진행하기만 하면 되는 예식이 되었다.

간호사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하면 환자 자신의 의지 여하에 따라 생명이 연장되든지 운명하든지 달려있다고 말한다. 아내는 하루 종일 입을 크게 벌리고 거의 혼수상태처럼 잠만 잔다. 나는 잠을 자는 아내에게 자꾸만 말해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남동생 인철 처남이 지금 올라오고 있다고. 동생이 오면 만나야 한다는 생각은 대단히 강할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내가 기운을 내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거기에 많은 기대를 걸고 몇 시간마다 한번씩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아내가 예상과 달리 그렇게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아내를 위해서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날 그렇게 운명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일이다.)

 

밤1시경 아내는 다시 굉장히 많은 양의 대변을 보았다. 그리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더니 묻는다. “여기가 어디야?” “병원이지 어디야.” “내가 어딘가 갔다 왔는데. 영미 아빠하고 산에 가서 얘기도 하고 왔는데.” “꿈을 꾸었군. 당신은 하루종일 깊이 잠이 들었었어.” “당신이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언니랑 인철 처남이 오고 있어.” “왜 갑자기 그렇게 됐는데?” “혈압이 떨어져서 그렇대.” 이렇게 해서 고비를 넘겼다.

어제는(10일) 컨디션이 계속 좋게 유지됐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다시 통증을 호소하여 주사를 맞았다. 그 후에 다시 호흡이 어려워져 보조 산소흡입기를 착용했다. 간호사 말로는 일회용 진통제 주사 때문이 아니라, 수액에 타서 계속 맞고 있는 모르핀 진통제가 원인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오늘도 다시 넘겼다. 내일 처형은 다시 서울로 간다. 나는 3일간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현기증이 느껴진다.


2003. 09. 12

오늘 아내의 정신은 오락가락이다. 아침에 미음을 먹으면서 무슨 알밤은 그렇게 많이 주어왔느냔다. “알밤이 어딨어?” “거기 있잖아.” 헛것이 보인 것이다. 그렇게 헛소리를 한단다. 그러기 시작하면 2-3일 후면 운명하게 된다고 간호사가 말한다.

아내는 하루 종일 잠만 잔다. 호흡이 느려져서 1분에 4-5차례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점점 느려지면 후흡이 멈춰 사망하게 된단다. 또는 혈압이 떨어져서 사망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 잠에서 잠시 깨어 변을 본다. 영은이가 치우고 닦아주면서 파우더를 발라준다. 그때 아내가 갑자기 말했다. “초란이 방정을 떠네.” 파우더를 바르면서 손놀림이 너무 작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2003. 09. 14

아내의 상태는 하루씩 오르락 내리락이다. 어제 아침에도 다시 혈압이 떨어졌고 호흡이 느려졌다. 이뇨제를 끊으면서 혈압이 다시 올라갔다. 어제 밤에는 대소변을 보는 회수가 적어서 나와 영은이가 잠을 좀 잤다. 아내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돌아 눕혀라. 다리를 내려라. 일으켜 앉혀라. 물을 달라. 기저귀를 갈아라.. 그런데 자주 헛것이 보이므로 엉뚱한 주문을 한다. “사람들 좀 다 나가라고 해.” 물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똥 눴어?” “꾹 참았지.” “왜 참아, 그냥 누지.” “길에서?” “아냐, 여긴 길이 아니고 우리 방이야. 아무도 없고 우리만 있어.”

아내는 청각이 더 예민해진 대신, 혀가 많이 굳어 있다. 우리의 말은 잘 알아듣고 금방 대답을 하는데, 말이 분명하지 않아 우리가 못 알아듣는다. 그러면 불만스럽게 말한다. “말도 못 알아들어!” 오늘 아침엔 모처럼만에 소변을 기저귀 가득 보았다. 혈압은 100-70으로 정상(?)이다.


2003. 09. 15.아침

어제 밤에는 숨이 답답하다고 했다. 호흡 보조기를 끼웠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벗어 던진다. 깊은 잠이 들지 않고 계속 뒤척인다. 어제와 오늘 새벽 2시까지 소변을 크게 세 번이나 보았다. 진한 쑥 색 대변도 두 차례 보았다. 변의 색은 순서가 없나보다. 나는 쑥색에서 까만색으로 변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까만 색은 지난번이었으므로 지금은 쑥 색이 당연하다는 듯이 간호사가 말한다.

영은이는 첫 날 몸살, 둘째 날 설사(김밥 식사 후), 그리고 아직도 설사가 계속된다. 밤에는 간호사에게 약을 얻어 먹였다. 어제 오시겠다던 처형은 오늘에야 오신단다. 어제 오후 집에 물건들 챙기러 가는 길에 누구라도 불러 운전을 부탁하고 1시간쯤 술을 몇 잔 마시고 싶었다. 그러면 피로가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도와 줄 사람이 연결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아내의 혈압은 65-30이란다. 걱정이다.


2003. 09. 17.새벽

어제 병실을 옮겼다. 그런데 오후부터 아내가 지속적으로 앓는 소리를 낸다. 단순한 앓는 소리라기보다는 거의 혼수상태에서 호흡과 함께 매번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낸다. 오전에 주사를 바꾼다고 했는데, 약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동안에는 3가지 모르핀 주사약에다가 먹는 약과 붙이는 약을 보탰는데, 이번에는 6가지 약을 한꺼번에 주사한다고 한다. 어제 오후부터 지금까지(새벽 5시) 쉬지 않고 똑같은 앓는 소리다. 처형은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야단이다. 밤중에 주치의에게 문의했더니, 지난번 호흡 곤란이 왔던 때보다는 맥박이나 혈압 등이 양호하다고 한다.

 

나는 지난 밤 잠을 많이 잤다. 그런데 잔 건지, 앓은 건지 모르겠다.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아내에게 달려 갔다가도 처형이 더 자라고 말하자마자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진땀을 계속 흘렸지만, 너 댓 시간은 잔 것 같다. 새벽 3시에 처형과 교대했다. 처형은 교대한 후에도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신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그 마지막 과정(모르핀으로도 더 이상 안 듣는 그 엄청난 고통의 기간)을 아내가 결국은 모두 겪고야 마는 것인가. ‘제발’, ‘제발!’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런 상태로 여러 날을 더 끌면 내가 지쳐 쓰러질 것 같다. 그저께 낮에는 모자라는 잠을 자고 샤워를 하러 집으로 갔다. 그러나 점심식사와 함께 술을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장례식 때 필요한 사진과 TV녹화 테이프 찾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샤워만 하고 다시 병원으로 와야 했다. 그 사이에 해주네 식구가 병원을 다녀갔다.

오늘은 세인네와 인경이네가 오기로 했다. 와서 저런 모습을 보면 충격 받을지 모른다. 주변 사람들이 각자 생활에 바빠 잊고 살아 온 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힘든 고통의 나날을 보냈는지 직접 확인하게 될 것이다.


2003. 09. 20

아내는 그날 떠났다. 내가 새벽에 일기를 썼던 9월 17일, 의사는 아침에 와서 위독하다고 말한다. 학교에 강의를 들으러 올라간 영서에게 급히 연락했다. 2시경 세인네와 인경이네가 도착했고, 3시 반에 영서가 도착했다. 사람들이 말을 하면 잠시 주목하는 듯하다가 이내 다시 혼수상태에 빠진다. 영서가 와서 엄마를 부르니 영서 쪽으로 눈을 돌린다. 영서가 말하는 동안 그리고 엄마를 보고 있는 동안 한참동안 영서와 눈을 마주보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편히 쉬라고 했더니 1시간이 못되어 호흡을 몇 차례 몰아쉬고는 눈을 감았다. 아내는 우리의 염려를 덜어주며, 의사가 예고한 두 달을 기다리지 않고, 한 달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최악의 고통을 더 이상 당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쓰러질 정도로 지치기 전에 아내는 눈을 감았다.

 

아내가 눈을 감자마자 나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말해주었다. 여성단체 회원들이 당신 장례식에 모두 오기로 했다고. 당신이 사랑하고 보고 싶어하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보러 오기로 했다고. 그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서 많은 사랑을 받고 편하게 떠나라고. 나는 아내에게 장례식에 대해 미리 말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숨을 거두자마자 얘기해 주었다.


[장례식]


장례 과정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사랑을 베풀어준 고마운 기간이었다. 전북지역의 모든 여성단체 회원들이 참여했다. 한국여성의 전화 전, 현 대표가 참석했다. 익산여성의전화, 군산여성의 전화, 영광여성의전화, 청주여성의전화, 서울여성의전화, 인천여성의전화, 광주여성의전화, 부산여성의전화에서 방문하고 조전을 보내왔다.

 

여성장은 아내가 부담스러워했을 것이므로 나도 당연히 사양했었다. 그런데 여성단체 회원들은 장례식을 통해서 아내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냈다. 아내의 장례절차는 여성들의 힘으로 여성 지도자를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아마도 특별한 지도력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미 있는 지도자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도 아쉽게 떠났기 때문에 평범한 동료에서 지도자로 모시고 싶은 마음들이 간절했던 것 같다. 군산참사의 희생자들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아름다운 눈물이 줄줄 흐르는 기회를 모두가 함께 나누는 것 같았다.

너무도 고맙게 치러진 장례식을 모두 마친 후 저녁에 집에 와서 처형과 영은이가 방 청소를 했다. 영서는 어두워지기도 전에 잠이 들었고, 우리는 두 시간쯤 대화를 나눈 후 졸음이 몰려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팔다리에 알이 밸 정도로 조문객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더구나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모두들 곯아 떨어졌다. 그런데 나는 또 새벽 3시에 잠이 깼다. 아직도 식은땀이 흐른다.

 

아내의 투병생활 7개월은 나에게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하루가 한 달만큼 길게 느껴지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2월말부터 아프기 시작했고, 7개월간 고생을 하였지만, 서울대병원에서 암 재발을 공식적으로 확인 받은 것은 4월 11일이었고, 9월 17일에 운명했으니 겨우 5개월만에 너무도 빨리 허망하게 떠난 것이다.


[후기]


아내는 2001년에 수술과 항암치료로 5개월, 금년에 재발 확인 후 5개월 동안 정말 고통스러운 치료와 투병생활을 했다. 회복기 2개월과 재발 초기 2개월을 합치면 모두 14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한 것이다.

건강하던 사람이 암 환자로 판명되면, 본인과 가족의 생활은 초비상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정신적으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고, 육체적으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환자와 가족을 혼란스럽게 하는 갖가지 과학적 비과학적 정보들이 뒤섞여 몰려온다.


환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소들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부터, 각종 보조식품(보조의약품), 그리고 종교의 힘에 대한 권고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누구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들은 돈이 많이 드는 약품과 식품을 구입하게 된다. 가족들이 마음을 굳게 먹고 합리적으로만 대처하려 해도, 병을 낫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과 함께 환자 자신의 심리적 기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필요한 것 이상으로 대응하게 된다.


나는 많은 자료들을 모아서 읽고, 상담을 받고, 대체의학을 하는 기관과 사람을 찾아갔다. 나와 아내는 평소에 생명의 연장을 위해 너무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래서 가능한 한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치료의 길을 추구했다. 그런데도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은 너무도 많았다.

내가 대학 병원 외에 주로 참고하고 시도한 것은 세 가지다. 황성주 박사의 대체의학 및 보조의약품, 한만청 교수의 책, 그리고 장두석 선생의 민족의학이다. 첫 번째 경우는 전북대 의대의 신화적인 존재인 은홍배 교수님의 추천에 따랐다. 5년 전 말기 암 수술 후 항암치료도 생략한 채 황성주 박사의 대체의학으로 아직도 건강하게 살아 계시는 은홍배 교수의 조언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한만청 교수는 역시 말기 암 환자로서 대학병원의 항암치료로 건강을 회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장두석 선생은 서양의학의 암치료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전통의학, 민간요법을 강조한다.

 

이 세 경우 모두 기적같이 살아난 환자들의 사례들이 있다. 이러한 사례는 곧 신화적인 이야기가 되어 널리 퍼져 나간다. 그것은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준다. 그런데 그렇게 퍼져 나간 신화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각각 절대화되고 상업화된다. 더구나 종교적인 기도의 힘과 결부된 신화는 더 결정적인 방식으로 절대화되어 수많은 맹신 요구로 연결된다. 아무리 악성인 암의 경우에도 사망률은 대개 95% 정도이다. 그리고 5% 이내의 생존자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정말 그들은 모두가 축하하고, 자랑할 만한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례는 언제나 엄청난 악성 상술과 미신을 양산한다.


난소암의 원인은 무엇인가


아내의 암 진단을 처음 확인했을 때 나와 아내는 도대체 무엇이 원인이 되어 난소암이 되었을까 많이 생각하고 그것부터 규명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병원에서는 그런 것은 부질없는 일로 치부하는 듯했다. 우리도 좀 지나면서 그것은 정말 부질없는 일일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몇 가지 커다란 스트레스 요인들을 발병의 원인으로 가정하고 있을 즈음, 같은 병실에 여고 1학년 학생이 입원하였다. 놀랍게도 난소암 수술을 받은 학생이었다. 난소암을 부인병이거나 극도의 스트레스가 원인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던 우리는 그때부터 원인에 대한 상상을 접어두고, 오직 치료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우리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의학의 수준도 대단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너무 높은 것이어서 실제 상황에서는 실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가지 첨단 기기로 촬영하고 종합적인 검진을 한 후에도 암 몇 기인지, 수술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한 진단은 나오지 않는다. 보호자들에게는 끔찍한 말이지만, 의사들이 확실하게 하는 말은 “열어봐야 안다”는 것이다.


친절이 신뢰감을 얻게 한다


현대 의학도 어차피 한계를 갖기 마련이므로 병원 관계자들이 환자나 가족들에게 질병의 내용과 환자의 상태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며 안내해 주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세는 환자들에게 신뢰감을 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교수의 회진만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환자들은 병실 회진이 의학도들을 위한 교육의 장일 뿐 환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진료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배신감을 느낀다.

이런 점들을 잘 지적하며 전인적 치료를 강조한 황성주 박사의 책은 환자들에게 큰 기대를 갖게 한다. 그러나 그가 세운 병원에서도 환자들은 의사들과 직접 대화하기가 어렵다. 상당히 전문적인 문제로 상담을 신청해도 대부분 간호사들 선에서 차단되기 때문이다.

중한 병에 걸리면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전북대 병원에 전문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재발했을 때는 전문가가 해외에 나갔고, 검사를 위해 서울대로 가보라는 병원 측의 안내에 따라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검사 후 서울대병원의 교수가 전북대 병원 전문가를 소개해 주어 다시 내려와서 치료를 받았다.

사람들은 왜 서울의 몇 몇 사립병원들을 선호할까? 경험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서울의 유명한 병원들은 시설과 함께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 간호사들의 태도가 훨씬 정중하고 친절한 것 같다. 거기서 사람들은 신뢰감을 갖게 된다.

 

너무도 많은 환자들을 대해야 하고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를 상대해야 하는 외래의 간호사들이 교양과 친절을 끝까지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서울의 사립 병원과 달리 의학도 교육을 병행해야 하는 대학병원의 교수들이 환자들에게 인간미와 전문성을 동시에 보여 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환자들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정성을 다하되 자연의 섭리에 따라야


아내의 간병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나의 경험은 지극히 우연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나의 일회적인 경험을 일반화시켜 남들에게 섣불리 가르쳐 주려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나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내 아내는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가족들에게 건강을 강조했다.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면서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했고, 환경을 생각하는 생활습관을 견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의 태도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성실하게 노력해도 기대만큼 건강이나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성껏 노력하며 사는 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며, 아내는 그러한 태도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