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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방 한칸

2018.08.10 05:55

물님 조회 수:729

지상의 방 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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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나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은 여수 광무동에서 자취를 할 때였다. 포항제철에 다니다가 회사를 GS칼텍스로 옮기고 보니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집이 여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광무동 달동네의 사글세방이었습니다.


열 달에 보증금 80만 원이었던 집. 연탄 아궁이가 있는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가 딸린 집이었다. 워낙 산꼭대기에 있다 보니 우리 집 뒤로는 달랑 두세 채의 집이 있을 뿐이었고, 그 집을 지나면 바로 장군산 정상이 가까이 있었다.


많은 집들 중에서 내가 굳이 달빛이 가장 빨리 닿는다는 광무동 달동네의 꼭대기로 올라간 까닭은 창문만 열면 여수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산정상이 가까워 날마다 산에 오르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쉬는 날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바람이 불었고 집 뒤의 미루나무에서 까치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 신호에 맞춰 창문 너머 골목길에는 우르르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뽀얀 웃음소리가 날마다 들렸다.


거기에 사는 아이들 대부분은 내 어렸을 때하고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이었다. 코를 흘리고, 연탄재로 놀이를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깡통 차기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다고 날마다 외치는 아이들이었다.


엄마 아빠는 늘 바쁘고, 집에는 아무도 없거나 할머니만 계시는 아이들, 그래서 늦은 밤까지 가로등 아래서 노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이 불만이기보다는 그 삶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 중에는 커서 배를 타는 것이 꿈인 아이들도 많았다. 그곳 동네에는 아버지가 선원인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 중에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드물었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면 잘하는 축에 들어갔다.


하긴, 그러한 환경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는 가난해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가난한 집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가 나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부모가 가진 자본의 크기에 따라 아이의 꿈의 크기와 아이의 미래까지도 결정되는 사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는 집보다 더 넓은 꿈을 가진 아이도 줄었고, 자신이 사는 집보다 더 거창한 꿈을 가진 아이도 줄었다.


이렇게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물질의 크기가 아이의 꿈의 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 것은 사치인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가 싸우지 않고 그저 오손도손 사는 것이 아이의 소원인 아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난은 어른의 가난과 차원이 다르다. 아이들의 가난은 아이 자신의 노력이나 운명과는 무관하게 부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가난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가난보다 훨씬 더 아프고 슬프고 가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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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맞닿은 달동네에는 늘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언제나 사람 냄새가 났다. 골목길을 오르다 보면 변소에서 나는 냄새가 자주 났다. 특히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에 있는 담벼락 아래는 술 취한 취객이 급한 볼일을 볼 수 있는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그 자리에는 어김없이 ‘소변금지’라는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가위 하나가 늘 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냄새를 참지 못한 집주인이 그려놓았을 것이다. 여차하면 자르겠다는 협박이었지만 잘린 사람은 보질 못했다.


밤에는 이웃들이 모여서 웃음꽃이 핀 날도 많았다. 마당의 평상에 모여 서로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는 이웃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른들 싸우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렸다. 그렇게 싸울 줄 알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사는 법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을 가려면 여수시민회관에서 내려 좁은 골목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야 했는데, 그 골목길을 올라가다보면 골목길로 나 있는 여러 개의 창문들을 지나야 하는데 그 틈 사이로 도란거리는 그네들의 이야기 소리가 늘 들리곤했다.  


그 골목 끝에 내 방이 있었고 나는 그 방에서 날마다 글을 썼다. 그때까지 애인도 없었으니 데이트도 못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방 한 가운데에 앉은뱅이 책상 하나를 펴놓고 날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일이었다.


그 일이 그때는 더 없는 행복이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고고한 달빛이 창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때는 언제나 외로웠고 언제나 고독했다.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면 글재주에 대한 부족함이 자주 느껴졌다.


그러면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과분하게 여섯 권의 책을 냈지만 나는 아직도 글이 고프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과 함께 인생을 걷고 있는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내게 글이 없었으면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정답게 소통할 수 있었을 것이며 살아오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좌절과 아픔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겠는가.


광무동 달동네의 사글세방. 내 글의 시작은 날마다 달빛이 스며든 이 조그만 방에서 시작되었다.


by 괜찮은 사람들
     박완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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