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287457
  • Today : 481
  • Yesterday : 845


거짓말을 타전하다

2012.04.24 01:06

물님 조회 수:1217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3 이장욱, 「토르소」 물님 2012.03.27 1289
282 이기인- 소녀의 꽃무뉘혁명 [1] 물님 2012.01.13 1294
281 [1] 샤론(자하) 2012.03.12 1294
280 빈 들판 - 이 제하 물님 2012.05.07 1298
279 풀 - 김수영 [1] 물님 2011.12.11 1299
278 나는 배웠다 / 샤를르 드 푸코 [1] file 구인회 2010.07.27 1301
277 눈물 [1] 물님 2011.12.22 1303
276 고향집 오늘밤 / 이중묵 이중묵 2009.04.06 1304
275 새벽밥 물님 2012.09.04 1304
274 석양 대통령 물님 2009.05.13 1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