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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 새겨진 예수의 숨결」을 읽고


평화 황호건


마태복음에 새겨진 예수의 숨결을 다시 읽으며 다음과 같은 질문에 촛점을 맞춰 봤습니다.

첫째 이 책은 마태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실존적 한계상황인 불안과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화로 가는 길로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어떻게 변증하고 그 답을 제시하거나 찾게 안내하고 있는가?
둘째 이 시대가 포스트모던, 탈종교, 생태 파괴, AI의 출현과 양자역학 같은 과학의 급발전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시대변화의 경계에서 직면한 보편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 책은 이 시대의 언어로 마태복음을 통해 어떤 답들이나 길을 제시하고 있는가?
셋째 이 시대 이 땅의 교회들이 가지는 문제들을 어떻게 진단하고 그 처방을 제시하고 있는가?
넷째 '○○○이 어떻다'를 말 하고 나서 '긍게 어쩌라고?'라는 질문에 어떤 실천적 답이 제시 되거나 아니면 길을 알려 주고 있는가?
다섯째 이 책에 비추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읽습니다.
이런 질문은 비단 저만의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1. 표제에 대해

저는 표제인 '마태복음에 새겨진 예수의 숨결'에서 '숨결'에 주목하였습니다. 왜 '숨'이라고 하지 않고 '숨결'이라고 했을까? 답은 바로 표지 밑에 있는 글 ' 만물이 하나의 숨을 쉬고 있다'에 있었습니다.
숨결은 물결과 같은 파동입니다. 물결의 입자들이 물결이라는 파동을 만들어 내듯 숨으로 드나드는 공기 입자가 숨결이란 파동을 만들어 냅니다. 입자는 부딪혀 서로 튕겨 내지만 파동은 간섭과 중첩현상으로 서로를 포용합니다. 전자 같은 작은 입자를 쉽게 관찰할 수 없는 것은 관찰하기 위해 빛을 비추는 순간(아토초: 백만분의 1초) 빛 입자가 전자에 부딪혀 전자가 튕겨 나가기 때문입니다. 입자는 이렇게 서로를 밀어냅니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쳐도 책상을 뚫지 못하는 것은 책상의 전자와 손바닥의 전자 입자가 서로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동은 서로 포용하며 에너지를 상승시킵니다. 그래서 숨결의 파동은 원융무애(圓融無礙)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연결 되어 상생(相生)시키는 생명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의 숨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태초부터 이어진 생명의 파동입니다. 하여 그 숨결이 마태복음 저자들과 연결되어 복음에 새겨지고 그 숨결이 숨님과 연결되어 이 책에 새겨졌으니 숨님의 숨결과 연결 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생명의 싹을 틔우고 또 앞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어떤 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나는 어떤 숨결로 살 것인가?' 라는 길 없는 길을 찾아 떠나는 궁극의 결단을 촉구하는 화두입니다.


2. 1부 여인의 아들 예수

1) 마태복음 소개와 변증

마태복음이 쓰여 진 여러 배경과 목적이 있겠지만 당시 예수를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유대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핍박 받는 상황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곧 우리의 왕 메시아이며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미 도래했다!'를 선포하고 변증할 목적으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그래서 첫머리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왕임을 변증하는 것을 넘어서 신을 향한 의지로 머리를 들어 하늘을 향하는 당신이 곧 이 시대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그리스도로서의 대승보살의 삶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의 특징으로 하나님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의 교회와 이 시대의 교회와의 간극을 매우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합니다.

2) 왜 여자의 아들인가?

여인은 마땅히 인간으로서 존중 되어야 합니다. 이 책에서도 성서에 기록 된 네 여인을 소개합니다. 물론 뉴페미니즘의 발호는 아닐 것이지만 마리아 숭배라는 오명을 벗기기에는 충분했다고 봅니다. 초사흘 날이면 어김없이 목욕제개하고 시루떡 쪄서 뒷마당 장독대에 올려놓고 치성 드리던 엄니가 네 살 전 부터 나를 등에 업고 오리길 들판 건너 자양교회를 다니시며 드린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찌 내가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랴? 할렐루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점은 여인의 아들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을 남녀로 나누어 분별의 씨앗을 심었다는 점입니다. 선악의 분별 이후 모든 분별은 어느 한쪽으로 취착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남녀의 분별은 오랫동안 똑 같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자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도 여자는 예배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분별을 넘어 이 시대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해야 또 하나의 화두입니다.

3) 기독교 수도문제

Pp110~111에는 하나님나라의 소유에 대해 말하며 전통적인 사막의 교부들이 행해 왔던 여러 갈래의 수행을 집대성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이야기로 기독교 수행문제를 다루는데 오해 할 부분이 있어 써 봅니다. 일반 교회에서 수행을 말하면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받는 구원과 다르다며 이단 삼단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 안토니오로 부터 비롯 되는 사막의 교부라 일컬어지는 분들은 처음 세상에서 멀어지기(fuga mundi)위해 사막 깊이 은둔 했고 철저한 독신 생활의 금욕과 노동 그리고 자발적 가난과 절대자와의 통교를 위한 관상기도 등의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여기서 수도를 수행이라는 말로 바꾸면 약간 종교색이 입혀져 뉘앙스가 다르지만 추구하는 것은 같습니다.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가 집대성한 책 「프락티코스」 「그노스티코스」 「켈팔라이아 그노스티카」라는 삼부작을 보면 수도승의 어떤 수행의 체계가 보입니다. 「프락티코스」는 프락티케(pratiké, 수행)로 인간의 마음을 오염 시키는 욕망과 감정을 정화하기 위해 여덟 가지 주요 악한 생각과 싸우는 영적 투쟁을 뜻하며 욕정의 부재와 내적평정을 뜻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불교의 定과 止修行에 해당하는 사마타와 같습니다. 「그노스티코스」는 그노스티케(gnostiké, 관상 contemplatio· 인식)로 인간의 이성에 쌓인 무지를 걷어 내어 참된 지혜를 드러내는 영적 투쟁을 뜻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는 내용입니다. 이는 불교의 慧와 觀修行에 해당하는 위파사나와 같습니다.
그 끝에는 신비적 갈망 속에 절대자와 합일하여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이는 불교의 열반과 해탈에 해당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측에서는 수행체계에 대하여 경률론(經律論) 삼장에 근거해 2500 여년 동안 끊임없이 추구하고 연구하고 계승하여 순서와 내용 방법을 체계화 한 차제(次第)가 분명 한데 비해 기독교에서는 성서에 수도 또는 수행 자체에 대한 언급과 체계가 전무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막의 교부들은 영성의 고양을 위해 스스로 수도의 길로 들어섰고 수많은 수도원을 건립해 수도자의 길을 걸으며 불교의 論書와 같은 수도 지침서들을 남겼습니다. 그마저도 대부분 사라지고 카톨릭의 수도원 부문에서만 명맥이 유지 되고 일반화 되지 못한 형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숨님께서 말한 바와 같이 결코 수행이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의 대상과 주제는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주제는 마음이 아니라 영혼과 하나님나라 라는 숨님의 생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 또는 '영원한 현재' '현존' '지금을 살다' 라는 말들은 과거와 미래로 달리는 생각과 감정을 멈추고 지금 내가 마음과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지금과 즉 (卽)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금에 즉해 있는 마음과 몸을 관찰하고 집중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이 수행이 불가의 사마타와 위파사나 수행이며 선(禪)입니다.
에바그리우스도 수도의 깊은 단계에서 마음과 몸에 욕정이 사라지고 마음의 내적평정을 뜻하는 아파테이아(apatheia)를 중시하여 수도의 대상과 주제가 몸과 마음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수행은 개념적인 영혼이나 하나님나라가 아닌 영적인 삶과 하나님나라 살이라는 동사입니다. 흔히 '그리스도 안에서(έν χριστου)'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크리스쳔들은 누구나 말씀을 붙들고 있으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는 이루어지지만 ‘그리스도가 내 안에’는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예수는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낮춰 우리를 온전히 품지만 우리는 아직 탐진치에 오염된 자아로 채워져 있어 예수가 거할 자리가 없습니다. 저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안에' 합일 된 상태를 '일체의식' 이라고 부릅니다. 이 일체의식은 태초에 내가 하나님의 허리에 있을 때부터 형성 되어 있었습니다. 일체의식의 영성은 온 우주로 확장 됩니다. 크리스쳔들의 수행은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도처럼 몸과 마음을 비우고 낮추는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이 그렇게 수도하여 합일에 이르는 깊은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 비로소 성령에 힘입어 일체의식으로 내안의 그리스도가 살아 사랑과 헌신을 바쳤던 것입니다. 하여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라는 일체의식의 영성 수행은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나라 살림이라는 영성으로 가는 과정이요 수단입니다. 북미와 유럽에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이 불교 사원을 찾아 수행에 참여하며 수많은 명상센터에서 명상을 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영성을 추구함에 있어 기독교나 유대교에 비해 불교가 깨어 알아차리고 멈추어 관찰하고 버리고 비워 고요한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안에 합일하는 영성으로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차제(次第)를 잘 갖추어 실참 할 수 있게 함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시 생각해야 될 것은 도깨비 방망이처럼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환상이 만들어낸 오늘날 교회의 몰각한 현실에서 기독교 나름의 실천적 수행체계를 세워 기독교 영성을 고양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점입니다. 이 시대에 모든 교회가 흔쾌히 받아드릴 수 있도록 예수의 숨결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라는 일체의식의 영성을 향한 수행체계 확립이 또 하나의 화두로 다가 옵니다.

4) 수비학
2장 예수의 족보와 마리아에서는 숫자와 사람, 장소, 사물 등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학문인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이 소개되고 수비로 여러 의미를 도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착각과 오해 중의 하나가 수비학에서 다루는 숫자와 수학에서 다루는 숫자를 같게 보는 것입니다. 같지 않습니다. 수학에서 다루는 수는 약속 된 기호이지만 수비학의 숫자는 기호가 아닌 의미입니다. 예로써 유다이즘에서는 7을 완전 수로 여깁니다. 7까지가 땅의 수라면 8은 거룩한 하늘의 수입니다. 할례를 8일만에 해 약속의 자녀 하늘사람이 됩니다. 숨님은 10을 완전 수로 봅니다. 수로 되어 있는 천부경에서는 1을 하늘 2를 땅 3을 사람으로 보며 1+2+3=6으로 6을 완전 수로 보는 경우와 천부경의 수를 모두 합하면 99가 되는데 9×9= 81 8+1=9로 보아 9를 완전 수로 봅니다. 수학자에게 1이 하늘이라고 하면 어이 없어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 부여하는 의미가 다릅니다. 또한 게마트리아는 히브리어 알파벳 하나 하나에 수를 등치 시킨다. 히브리어 구약성서 전체를 파자해서 수로 변환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계시록의 짐승의 수 666을 문자화 하면 네로가 된다고 한다. 숫자를 암호화한 경우입니다. 수비학의 수는 어떤 현상을 설명하거나 문장을 해석하거나 전승 되는 비밀을 푸는 미스티컬 하고 오컬트한 도구 일 뿐 모두가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 그 자체는 아닙니다.



3. 2부 9의 세례요한과 10의 그리스도

저는 종교적 언어나 텍스트를 볼 때 일정한 어떤 틀을 사용하여 영적 또는 의식의 수준을 가늠해 보는데 그 틀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에 갇힌 일상의 삶이 영위 되는 땅에 속한 세간(世間)의 속제(俗諦:세간의 진리)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늘의 삶이 영위 되는 출세간(出世間)의 진제(眞諦: 출세간의 진리)의 구분입니다. 사람의 행적도 마찬가지로 구분합니다. 이것은 그 종교적 언어와 텍스트 그리고 행적을 방편과 궁극적 목적으로 구분하고 즉 달인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인지와 땅의 일을 하늘의 언어로 또는 하늘의 일을 땅의 언어로 말 하는지 구분하여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숨님께서는 보통 9까지의 의식이나 세계와 9를 넘어선 10부터의 의식과 세계로 말하는데 여기서 9까지가 속제이고 9를 포월한 10부터의 데카가 진제로 봅니다. 속제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 진 사물 들은 허망할 뿐이라는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 속제의 땅의 것을 사모하지 말라는 말 입니다. 속제의 사물을 갈애하고 취착함이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높은 단계의 의식과 세계로 나아가면 속제와 진제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이제합명(二諦合明)인 일체의식 수준이 된다고 봅니다. 성서에서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또는 '하늘의 것' '땅에 것'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성서를 볼 때도 이런 틀로 비추어 볼 때 오해를 없게 합니다. 성서의 수 없이 많은 메타포들은 하늘의 진리를 땅의 언어로 쓴 속제 입니다. 이런 메타포들은 달이 아닌 손가락 이기 때문에 성서를 읽는 것은 하늘의 뜻인 달을 찾는 것입니다. 달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지혜 있는 자들(진제의 사람)이 그리스도인 진리의 빛으로 조명해야 보이도록 텍스트와 행간 그리고 narrative에 꼭꼭 숨겨 놨습니다. 9의 세례요한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이 땅에 메타노이아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며 주의 길을 예비한 속제의 사람입니다. 신께서 이 땅에 쓰시는 지팡이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의 그리스도 특히 예수라 칭하지 않고 그리스도라 칭한 것은 말씀(진제)이 육신이 되어 이 땅(속제)에 거하며 빛으로 신을 모르는 많은 이들의 무지를 밝혀 불안과 고통이라는 실존적 한계상황으로 부터 벗어 나게 하는 새로운 존재(이제합명)이기 때문입니다. 숨님은 10이 완성이라고 했지만 0에서 부터 9를 넘어 10 까지의 이제합명 원융이 진정한 완성입니다. 이 책에서 숨님은 우리 몸은 땅에 발 붙여 속제에 속해 있지만 의식의 지평을 데카 넘어로 열고 머리를 하늘을 향해 진제를 추구하고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어 나가는 합명이제의 하나님자녀, 하늘사람인 기독보살로 살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10의 그리스도야 말로 하늘사람이 땅으로 내려와 수많은 사람을 건져내어 하늘 사람이 되게 한 진정한 그리스도보살 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숨결로 하늘의 진리를 이 땅에서 구현해 내며 하나님나라 살림을 살 것 이냐는 즉 9에서 10을넘어 다시 9와 10의 경계를 무너뜨려 좁은 길과 문을 넓게 하는 기독보살의 이제합명이 이 책에서 던져 준 또 하나의 화두 입니다.


4. 3부 환생(還生)

환생(reincarnation)은 죽음과 윤회 그리고 무엇이 환생 하는가의 문제인 업(業 카르마)과 영혼불멸이 전제 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또한 환생은 사실의 언어가 아니고 믿음과 감성의 언어입니다. 밥을 먹으니 배가 부르다는 말은 사실의 언어지만 너를 보니 안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은 믿음과 감성의 언어입니다. 성서에는 사실로 입증 하거나 검증할 수 없는 믿음과 감성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환생이라고 여겨지거나 오해될 기록들도 대부분 메타포적 이지만 역시 믿음과 감성의 언어로 기록 되어 있습니다.
윤회( संसार saṃsāra)와 환생이라는 아이디어는 고대 사람들이 자연의 순환 과정 즉 저녁에 졌던 태양이 아침에 뜬다 든지 식물의 씨앗이 떨어져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씨앗을 맺고 그 씨앗이 떨어져 또 다시 싹을 틔우는 것으로 부터 얻어지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합니다. BC 6C경 인도의 아리안족이 세운 힌두교에서 카스트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이 짓고 신이 정한 업의 결과에 따라 차등화된 계급으로 태어 나고 그것을 윤회하는 원리로 개발해 체계화 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좋은 업을 지어야 다시 잘 태어난다는 종교 윤리적 교화 도구로 삼았습니다. 저로서는 누가 주장했거나 어디에 기록 되어 있던지 윤회와 환생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첫째 죽음과 죽음 이후의 문제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아이디어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 후의 문제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살아 있을 때 누리던 모든 것을 죽음 이후에도 연장하려던 탐욕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윤회와 환생이 유효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의 전생 체험과 임사체험이 모두를 대변하는 보편성을 담보 하지는 못합니다.
둘째 윤회와 환생 아이디어는 모든 가능성과 변화를 부정하는 결정론적 운명론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카스트제도 하의 불가촉천민이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기 전의 전생부터 결정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의 신분제 하에서는 노비의 아들딸은 노비가 되었습니다. 윤회와 환생의 아이디어는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 선하게 살아가게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하이라키적 통제와 폭력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셋째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개념화 된 윤회의 고리와 족쇄를 끊어 내고 해방 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서의 역사관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는 직선형 인데 비해 윤회와 환생은 처음도 끝도 없는 순환의 역사관이기 때문에 충돌을 일으킵니다. 성서의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아이디어 입니다.
다섯째 윤회와 환생의 아이디어에 꼭 들어가야 하는 '무엇이 윤회하고 환생 하느냐?'에서 업을 담고 있는 영혼의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는 영혼 창조설과 영혼 선재설을 말 하고 있지만 저는 영원 불변하고 고정적인 실체로서의 영혼을 부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영혼을 매개로 하는 윤회와 환생은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은 업에 따라 윤회 하거나 환생하는 영혼이 아닌 일체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전통이나 성서에 환생처럼 보이는 기록들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에 부딪힙니다. 저는 그 상황에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을 이해 시키는 하나의 메타포로 보며 환생으로서의 예언의 성취로 표현되는 이야기 또한 메타포로 봅니다.
윤회 즉비 윤회 시명 윤회(輪廻 卽非 輪廻 是名 輪廻) 윤회는 윤회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윤회일 뿐이며
환생 즉비 환생 시명 환생(還生 卽非 還生 是名 還生) 환생은 환생이 아니며 다만 이름이 환생일 뿐이기 때문에 이 믿음의 언어들이 지금 여기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길을 좇아 가고 진리를 추구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나님나라 살이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에 비추어 각자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저는 숨님의 '성경에 윤회와 환생으로 해석되는 본문도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처럼 부활의 신앙으로 다가서는 하나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서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인에게 전생은 없다. 영원한 현재인 지금 여기에서 임마누엘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에게 죽음은 없다.' 라는 말에 동의하고 지지합니다.



5. 제4부 숨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 즉 생명운동이 미치도록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본서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죽고 나서야 가는 천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하늘의 뜻에 합당하게 예수의 숨결로 살며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역동적인 삶이 하나님나라 라고 말 합니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갈 것이냐의 답을 하나님나라 복음에서 찾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숨결로 살아가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요 하늘의 기업을 상속 받은 자녀입니다. 나는 역사의 변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하는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고 하나님나라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세상이 비록 혼탁하고 부패해 보여 발 딛고 서 있기 싫은 것 처럼 보이나 이는 허상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이 그 안에 있기에 일체의식으로 이 세상 이 땅이 사랑하는 하나님나라가 되도록 나 하나가 나아갑니다. 본서는 이러한 답과 길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숨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숨결로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풀 한 포기 까지 사랑하며 영적 목표를 향해 멈추지 말고 달려가라는 간곡한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지상 과제 입니다.



6. 5부 부활-죽음이 죽은 사건

부활! 이 또한 믿음의 언어입니다. 본서에서는 부활 즉비 부활 시명 부활(復活 卽非 復活 是名 復活) 곧 부활은 부활이 아니라 그 이름이 부활일뿐이고 그 본질은 죽음이 죽은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이 믿어지면 믿으십시오. 저는 몸이 다시 산다는 이 말이 고통 가운데 있는 믿음의 자녀들에 대한 가스라이팅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거부 합니다. 어차피 다시 산다 해도 늙어 죽을 몸이 신령한 몸이라고 포장한다고 달라질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일 듯 이 몸으로 잠시 지구학교에 와서 하나님의 숨결로 살다가 이 몸의 숨이 다하면 본래 흙먼지로 된 이 몸은 다시 왔던 대우주의 품으로 돌아가고 영원한 하나님의 숨결로 남아 태초부터 나 였던 일체의식으로 여여(如如)할 것입니다. 육신을 초월한 대해탈 열반이 죽음을 죽인 부활입니다. 승려들이 적멸에 들면 장작을 모아 시신을 태우는 다비(茶毘)를 합니다. 이 의식은 불로 불을 끄는 모형입니다. 보통 육신을 가지고 살 때의 온갖 고통을 번뇌라는 불로 표현합니다. 죽음을 죽음으로 죽이 듯 번뇌의 불을 불로 꺼 대 열반에 들도록 합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숨결로 이루어진 일체의식을 깨달으면 모든 것이 분리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일체의식으로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내가 네 안에 네가 내안에'라는 선포가 죽음을 죽였음을 말하고 일체의식에 깨어 있음을 말합니다. 죽으면 끝이고 소멸이라고요? No!!! 여여히 하나님의 숨결 영원한 일체의식으로 살아 있습니다. 이론상으로 공(空)의 세계관에서는 생멸불이(生滅不二)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생사불이(生死不二)가 논증되어 죽음이 없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없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조문을 가보면 망자의 시신이 냉동실에 버젓이 있는데 죽음이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감을 하지 못하는 이것이 생각에 갇혀 깨어 꿈꾸기에 실상을 보지 못하는 병통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을 차치 하고라도 산속의 다람쥐는 죽음 부활 그딴거 고민하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삽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죽어 병실에서 안치실로 옮기는데 할머니가 따라가며 보니까 손이 꿈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의사가 죽었다는데 왜 또 살아나려고 지랄이여!' 하더랍니다. 할아버지가 살아생전에 퍽 속을 썩인 모양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산 사람의 웃음과 슬픔은 망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잘 합시다! 살아 있는 지금 여기가 죽은 뒤 보다 중요합니다.
숨님은 말미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28:20)는 말씀으로 맺습니다.
또한 앞에서 숨님은 지금 이 순간이 앞으로 나아갈 때니 멈추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流水不腐(유수불부) 轉石 不生苔(전석 불생태)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처음의 여러 질문을 품고 읽으며 답과 길을 찾고 나아갈 추동력을 얻었습니다.

이 책 본문은 5부 57장과 소제목을 세어보니 대충 183개가 되고 총 455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님의 깊은 영성을 어찌 다 담을 수 있었겠습니까? 나머지는 독자들이 더 써 나가야할 몰이라 봅니다. 이 귀한 책을 만나게 한 숨님께 경의(敬義)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천복을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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